영랑 김윤식 선생 묘지 강진으로 이전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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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5-03-25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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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피기까지는'으로 잘 알려진 시인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ㆍ1903~1950) 선생의 묘가 고향인 강진으로 이전이 추진된다.

강진군이 유족들과 협의끝에 영랑선생의 유해는 66년 만에 그리운 고향 품으로 돌아오게 될 전망이다. 영랑선생의 묘 이전이 이뤄지면 강진군도 영랑시인을 콘텐츠로 한 추모ㆍ문화ㆍ관광산업을 더욱 활발하게 추진할 것으로 기대된다.

●영랑선생 '고향 품으로'

강진군은 경기도 용인시 천주교 용인공원묘원에 위치한 영랑선생의 묘를 강진으로 이전하기 위해 유족들과 협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유족들 역시 영랑의 묘를 고향으로 이전하는데 상당 부분 동의한 가운데 이전 장소를 놓고 군과 논의가 진행중이다.

군이 유족들에게 제시한 묘 이전 장소는 세계모란공원이다. 영랑생가 뒤편에 조성 중인 세계모란공원에 영랑선생의 묘를 이전해 공원의 격을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현재 모란공원은 내년 초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반면 유족들은 묘 이전 장소로 영랑생가를 지목한 상태다. 하지만 현행 장사등에 관한 법률은 민가가 밀집한 지역에서는 300m 이내에 묘지조성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 때문에 군은 유족들이 제시한 안을 수용하기 위해 영랑선생과 부인 안귀련 씨의 유해를 화장해서 기념탑 형식으로 안장하는 방안도 검토 중에 있다. 현재 영랑선생의 선산은 도암 산정리와 해남군 계곡면 사이에 위치해 있다.

지난 1950년 9월 29일 서울에서 타계한 영랑선생의 유해는 남산 기슭에 가매장 됐다. 1954년 11월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 후 1990년 3월 경기도 용인공원묘원에 부인과 합장됐다.

군 관계자는 "영랑선생의 묘 이전은 유족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추진할 방침이다"면서 "묘 이전이 완료되면 영랑 관련 사업들도 극대화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활발한 영랑사업

강진군은 영랑선생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펼쳐오고 있다.

지난 2013년 조성된 강진읍 남성리에 자리한 영랑생가는 문간채와 안채, 사랑채로 이뤄져 있다. 영랑선생이 1903년에 태어나 1948년 9월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기 전까지 45년간 살았던 집이다. 5월이면 생가의 마당에 조성된 모란이 만개한다.

지난 1986년 2월 17일 전남도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됐다가 2007년 10월 12일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52호로 지정됐다.

강진군 시문학파 기념관은 '영랑 시인 감성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시문학파 기념관은 강진교육청 초등학교 정규 교육과목으로 채택됐다. '영랑 시인 감성 학교'는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가 공모한 2014 창조지역사업 '시가 꽃피는 행복한 마을, 강진'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월간 순수문학도 영랑시인의 시 정신을 기리고 자 영랑문학상을 제정해 운영하고 있다. 올해로 20회째를 맞는 영랑문학상을 통해 많은 문인들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밖에 영랑문학제를 비롯해 문화캐릭터와 관광 상품 개발에 박차를 기하고 있다.

●영랑선생은 누구?

영랑선생은 1903년 강진에서 태어나 강진보통학교를 마치고 1917년 휘문의숙에 들어가면서 문학에 관심을 두었다. 1919년 3ㆍ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거사를 꾀하다 잡혀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옥살이했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하며 박열(朴烈)과 같은 항일 독립투사들과 사귀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 귀국해 박용철 정지용 등과 시문학 동인을 결성하고 작품을 썼다. 1930년 창간된 '시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며 본격 활동했다. 1934년엔 고향의 구수한 사투리가 등장하고 대표 작품이 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발표했다.

순수시 지향의 초기와 달리 1940년대 일제지배 말기엔 적극적인 사회참여 성격의 작품들을 선보였다. 광복 후 강진에서 대한독립촉성회에도 참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고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낙선했다. 1950년 9월 서울수복 전투 때 유탄에 맞아 삶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