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代王朝와 風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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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9-03-14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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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유적가운데 半月城, 滿月城 같은 이름은 모두 風水사상에 따라 붙여진 것이다. 이처럼 예전 사람들의 생활은 풍수와 뗄 수 없는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 풍수사상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대개 三國時代 初로 추정되고 있다.
 
高句麗 淵蓋蘇文平壤城16년간에 걸쳐 증축한 뒤 新月城으로 고쳐 부른 것이나, 三國遺事脫解王에 관한 기록은 모두 風水사상이 三國시대 때 이미 생활 속에 파고 들었다는 증거다.
 
우리나라 최초의 風水的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三國遺事脫解王朝를 보면 탈해왕이 평민의 童子로 있었을 때 이른바 三日月形(초생달 모양)明堂宅地譎計를 써서 빼앗은 뒤 왕까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자세한 사연은 다음과 같다. 吐含山에 올라가 을 바라보다가 아주 살기 좋은 땅을 발견했다. 그 봉우리가 三日月形으로 되어있고 地勢가 좋아 오래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詭計를 써서 그 땅 밑에 礪炭(일종의 숯)을 파묻은 다음 이튿날 아침 瓠公의 집에 가서 조상대대로 살던 자기 집이라고 우겼다. 결국 官訟이 불게 됐다. 관원이 脫解王에게 당신 집이라는 증거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본디 대장장이로서 잠깐 집을 비워둔 채 이웃마을에 가서 살다가 돌아와 보니 엉뚱한 사람이 살고 있더라고 밝힌 다음 땅을 파보면 그 증거가 나올 것이라고 대답했다. 땅을 파보니 과연 대장간에서 쇠를 달굴 때 사용하는 숯이 나왔다. 그는 결국 이 땅을 빼앗아 살게 됐는데, 이 소식을 들은 南解王智謀가 출중한 사람으로서 장래를 맡길만하다고 판단, 그의 맏공주(阿尼부인)와 결혼을 시켰다. 그는 얼마 뒤 昔脫解라는 이름을 얻고 왕까지 되는데, 이른바 風水사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明堂땅을 빼앗아 산 때문에 을 얻었다고 믿기는 어렵지만, 당시 新羅人들 사이에 風水사상이 꽤 퍼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風水사상의 유행은 百濟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다. 高句麗에 밀려 公州都城을 옮겨야 될 형편이었지만, 새 도읍을 半月形으로 된 扶餘로 정한 것도 이왕이면 風水사상을 따르자는 생각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高句麗 都城 平壤은 중국에서 風水사상이 들어오기 이전에 설치된 곳이나 風水的조건에 들어맞는 도시로 꼽히고 있다. 高麗妙淸開京(開城)을 버리고 西京(平壤)으로 都城을 옮기자고 주장, 끝내는 반란까지 일으킨 것이 그 증거다. (사실 妙淸은 표면적으로는 風水地理때문이었지만, 실상은 정권 쟁탈에 더 큰 목적이 있었다) 風水사상이 우리나라에서 비로소 체계화되었던 때는 統一新羅時代부터 後三國, 高麗建國 初였다. 羅末麗初이다. 중국 나라 말기에 대 유행을 한 道家사상에 입각한 風水사상의 영향 때문이었다. 의 유명한 風水家 一行의 제자였던 道詵高麗 初風水사상을 학문적, 철학적(당시 입장으로 보아)으로 정립시키면서부터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道詵秘記를 비롯, 高麗중엽 睿宗1(서기1106)에 만든 海東秘錄,懲毖錄, 高麗末風水師(또는 地官) 羅鶴天이 지은 羅鶴天 秘訣,山川裨補圖鑑등 책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또 중국에서 風水書2原典이라는 靑烏經,錦囊經등도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이때부터 風水地理는 중국보다 우리나라에서 더욱 섬세한 면에까지 파고들어간 것 같다. 高麗文宗張琬이란 術士太師監侯로 임명했고 1195神宗때는 群臣들에게 국내 山川形勢를 연구케 한 다음 이른바 堪輿元氣라는 풍수지리에 따라 길을 내고 지방관청을 세우기까지 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風水사상은 더욱 깊숙이 생활 속에 파고들었다. 이것은 유교적인 祖上崇拜사상과 朝鮮建國風水的으로 합리화시킨 때문이었다. <다음호 계속>
우찬희(풍수지리 연구가)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