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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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9-03-1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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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CSF 발전 연구원장/박철호
이번 설을 지나면서 별 해괴한 일이 전파를 타는 것을 보았다. 며느리가 제사를 거부하는 것을 인터뷰해서 방송으로 내어 보낸 것이다. 또한 어느 인터넷 신문은 3대 독자가 제사상을 차렸다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이 글은 설을 지난 다음에도 갑론을박으로 번지는 형국이었다.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일들이 임기응변적으로 다루어져 오히려 역효과만 난 것이다. 아마도 명절제사 문제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파만파로 번져가게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제사문화의 배경은 독특한 농경사회의 가족문화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가족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제사를 반대하는 것이나 진지한 성찰 없이 제사문화를 훼손하는 행위는 가족관계를 훼손하려는 고도의 술책으로 보인다. 3대 독자의 제사상이라는 기사를 어느 대담프로에서는 정부의 모 부처가 사주한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말도 되지 않는 소설 같은 글을 인터넷 신문이나 방송으로 내어 보내는 것은 지금 같은 개명천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짜 뉴스가 판치는 세상에서 불신만 조장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한편의 에세이나 소설을 쓰는 것이 어쩜 나을지도 모른다.
 
명절제사를 찬성하는 쪽은 가족의 일체감에 우선순위를 둔다. 겨우 명절이나 기제사에 만나는 친척들은 제사를 빌미로 모인다는 것이다. 제사를 통하여 혈족 단합이나 결속을 도모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로 보인다. 엄중했던 일제의 압제 하에서도 상장례, 제례문제, 특히 제사문제는 함부로 말하거나 다루지 않았다. 작금에 들어 제사문제를 가지고 마치 여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처럼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또한 남녀 차별의 근거나 시가집이나 처갓집의 비교 수단, 본가와 남편가의 근거 없는 헐뜯기의 공방이나 빌미로 만드는 것은 더욱 잘못된 것이다. 가정이나 가족관계에서 이념이나 종교문제, 정치문제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는 원래 하늘 신(天神)에게 지내는 제사만 있었다. 고려시대는 모든 가정의 대소사를 사찰에서 했다. 조선 초기에도 제사는 활성화 되지 않았다. 제사가 활성화된 것은 농경사회의 틀이 잡히고 씨족집단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후부터다. 공자는 귀신을 모른다고 했고 부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유학은 제사와 관계없는 학문이다. 그러나 농경사회를 유지하고 씨족 공동체를 이끌기 위해서는 제사가 필요했다. 특히 씨족의 세를 과시하거나 단합을 만드는 기초가 되는 것이 명절제사이고 기제사였다. 그러다 보니 부모에게만 지내던 제사가 4대 봉사까지 된 것이다.
 
4대 봉사는 고조부모까지이다. 고조부모의 자손들이 모이면 팔촌이다. 8촌이 모이면 적어도 20여명에서 많게는 엄청난 숫자가 된다. 그러니 농경사회에서 그 힘이란 무시할 수 없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유학을 숭상한 집안일수록 제사를 강조했다. 공자의 후예라는 그들은 귀신이 없다고 주창하면서 제사를 지냈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귀신이 없다고 주장한 그들이 귀신을 부르고 귀신을 모시고 귀신을 섬겼다는 것이다. 조상에 대한 제사는 우리나라만 있는 독특한 끼리끼리 문화를 더욱 결속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제사의 방법은 집집마다, 지역마다, 문중마다 다르다. 이 제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은연중에 해체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제사의 전통을 주관하던 안주인들의 마음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제사를 지키고 가정을 돌보고 가문을 이끌던 안주인들이 변하고 있다. 그들이 제사를 폐하자는 것이다. 제례를 대처할 만한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제사로 인하여 모이던 일가친척이 사라지고 가정의 붕괴를 가속화시키는 속도가 빨라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그럼에도 제사를 지키고 자신의 뿌리와 족보를 찾겠다는 사람들도 만만치 않다. 오늘도 국립 중앙도서관 고문실을 찾아서 자기의 뿌리를 확인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 폐제사가 사회문제로 등장되는 상황이라면 지금이라도 제사에 대한 바른 이해나 새로운 가족문화, 명절문화를 준비하고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집은 조선 후기 정략장군(定略將軍)으로 오위장을 하신 분이었다. 이분의 아들은 평양의학을 한 명의(名醫)로 부모와 조부모의 제사를 온 정성으로 받들었다. 이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은 딸 넷에 아들 하나를 두었고 둘째 아들은 아들 일곱에 딸 셋, 셋째 아들은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었다. 외아들인 종손은 딸 넷, 아들하나를 두었다. 종손의 아들인 차종손이 대학을 다닐 때 수영을 갔다가 웅덩이에 빠진 친구를 구하고 죽었다. 이 아들의 어미인 종손 며느리는 2년간을 미쳤다. 제 정신이 돌아오자 지내던 제사 아홉을 음력 구구절 날, 큰 양품에 밥을 뜨고 국을 떠서 숟가락 아홉 개를 꽂았다고 했다. 그 종손 며느리가 죽었다.
 
한때 한 고을을 호령하던 장군네 종손집은 사라졌고 그렇게 대단하게 드리던 명절제사와 기제사는 폐제사가 되고 말았다. 종손 며느리네 큰딸은 귀신 아홉이 내 동생 하나 살려 주지도 못했는데 제사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악다구니를 썼다. 그런 그가 명절날만 되면 시가 큰집에 가서 시가집 귀신 여섯 분의 명절제사를 아무지게 지낸다고 자랑을 했다.
 
한국 CSF 발전 연구원장/박철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