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부인, 염경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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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4-14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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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부인, 염경애
아내의 이름은 경애였다.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니 나의 한이 어떠하였겠는가. 믿음으로써 맹세하노니, 그대를 감히 잊지 못하리라. 무덤에 함께 묻히지 못하는 일 애통하고 또 애통하도다...”
아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한 남자의 심정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이 묘지석은 고려시대의 한 여인 무덤 속에 있던 것이다.  
 
 1. 묘지석의 주인공

묘지석의 주인 염경애는 1145년 병을 얻어 이듬해 정월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를 잃은 남편은 아내의 삶을 회고하며 묘지석에 글을 새겼다. “아내는 사람됨이 조심스럽고 정숙했으며 자못 문자를 알아 대의에 밝았고 말씨, 용모, 일솜씨가 여느 여인보다 뛰어났다. 내 돌아가신 어머님을 효성껏 봉양했고 친척들의 경조사를 힘써 살피니 훌륭하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2. 남편 최루백

염경애의 남편 최루백은 고려사 열전에 실릴 만큼 효자로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교과서에 해당하는 삼강오륜도, 오륜행실도 등의 책들에도 최루백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이 최루백의 아버지는 수원 최씨의 시조이다.

3. 부부의 결혼 생활

염경애는 개경의 권세 있는 귀족집안의 딸이었고, 남편 최루백은 수원 향리의 아들이었다. 묘지석의 내용을 보면 그들의 살림살이가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고, 의복과 식량을 구하는 일은 전적으로 염경애가 맡았다고 한다. 아마 친정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4. 고려시대 결혼과 이혼

묘지석을 보면 염경애와 최루백은 매우 다정했던 부부로 보인다. 그런데 남편 최루백의 묘지석을 탁본해 보니 놀랄 만한 내용이 있었다. ‘재취 유, 3남, 녀’ 염경애 외에 유씨라는 여자와 또 결혼을 해서 세명의 아들과 딸을 두었다는 것이다. 염경애가 죽은 후에 재혼을 한 것일까? 아니면 염경애 외에 또 다른 아내가 있었다는 것일까?

5. 승려 - 출세를 위한 선택

염경애의 묘지석에 나타난 자녀들에 대한 기록에는 넷째 아들이 출가하여 승려의 길을 걷고 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최루백의 묘지석에는 그 넷째 아들이 벼슬을 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승려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지위와 명예가 동시에 주어지는 일이었다.

6. 고려시대의 묘지석

염경애의 묘지석을 통해서 고려시대 귀족가문의 3대에 걸친 가계도를 복원해 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사회적 지위도 알 수 있고, 두 주인공의 성품도 짐작할 수 있다. 묘지석의 내용이 그만큼 풍부하고 정확한 기록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묘지석들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고려시대의 빈약한 기록을 대신하고 있다.

7. 고려시대의 장례제도

묘지석은 귀족들의 전유물로 죽어서도 자신들의 신분을 나타내려 했던 고려 귀족들의 특권의식이 반영된 징표중의 하나이다.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 그 위에 글자를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새겨 넣고, 글자 뿐만 아니라 테두리에 무늬를 넣고, 묘지석 뒤편에 그림을 새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묘지석의 내용을 정리하고 돌판에 새기기까지 무척 오랜 세월이 걸리는데, 그렇다면 묘지석이 완성될 동안 시신들은 어디에 어떻게 두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