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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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23-07-07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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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CSF발전연구원장/박철호(시인. 상담학박사)

 

개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인륜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가 엉망진창이 되어도 누구 한 사람,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이 펼쳐지고 있다. 경제 대국이라는 나라, 세계 경제 10위권이라는 대한민국 국민 수준이 아프리카에서 제일 못사는 헐벗고 굶주리는 나라 수준보다도 못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수치 중의 수치이다. 똑똑한 사람은 많은데 정치적 이념으로 도덕 수준과 문화 수준이 제값을 못 한다면 세계적인 망신이다. 과학까지 부정하면서 편 가르기가 극에 달할 정도라면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국가 공동체는 국가이념이 우선 되어야 한다. 미국은 다양한 사람들이 보여 사는 합중국이다. 그 나라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제일 큰 목표는 그 나라 국기 앞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국가적인 뚜렷한 목표나 지향점이 있어야 구성원 모두를 하나로 묶어 영속성을 만들 수 있다. 조선은 유학이라는 이념으로 국가를 경영하고 지탱했다. 유학은 하나의 사상만이 아니다. 많은 사상을 ‘충효’라는 단어로 압축해서 국가이념으로 삼았다. 국가이념을 통치 수단으로 만들기 위해 실천할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했다. 그 무엇이 실천 방법으로 만들어진 유교였다. 유교는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들은 그들의 삶의 방법을 예의(禮儀)에서 가져왔다. 실천 방법으로 사례(四禮)라는 예의 절차를 만들고 그 절차를 지킬 것을 강요했다. 그들이 추구한 나라는 도덕군자의 나라가 아니었다. 문제는 국가를 운영하는 주체들이 그 제도로 자신의 유익을 챙기려고 했다. 인간은 살아가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가난한 사람이 훨씬 양심적이라는 말이 있다. 명예와 돈과 권력에 현혹된 자는 이미 오염된 자로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세상을 이용하려고 한다. 사람은 그가 행하고자 하는 것을 추구한다. 자신의 욕심을 구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 유익만 쫓아 살다가 흔적 없이 사라진다.
작금에 벌어지는 사회적인 여러 가지 문제들을 보면서 앞으로의 세상살이에 대해 기우(杞憂)하는 사람이 많다. 기우는 걱정일 뿐이다. 앞으로의 일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풀어 갈 일이다. 지금을 사는 사람은 앞으로의 세대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면 된다. 걱정은 아무 의미가 없다. 걱정은 걱정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살기가 어려워도 새벽은 오고 태양은 뜬다. 난리가 나고 전쟁이 터져도 사람 사는 세상은 그저 그렇게 살아간다. 오히려 약삭빠르고 악질적인 사람들이 사회 불안을 조성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유익을 얻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런데도 선한 사람은 항상 승리했다. 그것이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념 논쟁에 빠지고 정치 노름에 빠져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생각한다. 음모론자는 음모론적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그런 자들은 자기 생각의 틀 속에서 살아갈 뿐이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살지만, 마지막 종착지가 가까워져 오면 누구든지 덧없음을 깨닫게 된다. 덧없는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허무감이 밀려온다. 허무한 생각으로 고통을 느낀다면 그 인생은 잘못 살아온 것이다.
6.25 전쟁 후는 사회적으로 굉장히 어수선했다. 서울이나 시골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그분에게는 6.25 전쟁에 참전했던 삼종형(증조할아버지가 형제)이 있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형이 휴전되고 몇 년 후 귀향을 했었다. 함께 참전했던 전우가 청량리 근처에서 하는 일을 도와주며 지내다가 그 전우의 여동생과 혼인하게 되어 고향 선산을 찾았던 길이었다. 삼종형이 언제든지 서울로 올라오라면서 연락처를 주고 갔다. 그 형에게는 사촌 동생이 있었다. 이분과 비슷한 또래였다. 1950년대 중반기의 시골은 밥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 장가를 들어도 할 일이 없었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서울로 가기로 했다.
전주까지 온종일 걸어 나와 밤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청량리 삼종형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1년 동안 일을 도와주고 새경을 받아 시골로 내려갔다. 이분은 부인에게 자리를 잡고 연락하면 서울에서 살자고 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열심히 일해서 삼양동에 흙벽돌 월셋집을 얻었다. 시골로 편지를 보냈다. 부인은 봇짐을 챙겨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왔다. 이분은 공원묘지 조성 공사가 막 시작되던 시기에 공사장 인부로 일했다. 눈썰미가 좋아서 3년 만에 돌계단을 쌓고 조경을 하는 일에 탁월한 기술자가 되었다. 초창기 알만한 몇 군데 공원묘지 만드는 일에 직접 참여했다. 많은 돈을 벌게 되자 국도에서 고향으로 들어가는 3Km의 진입로 포장 공사를 해 주기도 하고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 산소도 새롭게 조성했다.
나이 70이 되자 아버지, 할아버지의 땅을 마련했다. 아버지의 땅은 장조카를 소유주로 하여 형제 자손 4명을 근저당 설정권자로 등기하고 할아버지의 땅은 장손을 소유주로 하여 사촌 형제 4명이 근저당 설정권자로 했다. 매년 아버지의 땅에서 나오는 쌀은 나누기로 하고 할아버지의 땅은 사촌들이 지분을 가지기로 했다. 문제는 이분이 죽고 난 다음이다. 이분이 죽자 장조카가 아버지의 땅을 자기 명의로 하려다가 분란이 나서 자기 형제들과 사촌들이 원수가 되어버렸다. 할아버지 땅은 지분권자인 사촌들이 죽자 다음 세대인 재종(6촌)들이 각자 지분으로 나누자고 의견이 분분하다. 한 조상의 자손들이 화기애애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력과 돈을 드려 만든 아버지의 땅, 할아버지의 땅이 분란의 소지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마땅히 지켜져야 할 일들이, 마땅히 행해져야 할 일들조차도 하지 못한다면 그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산소 관리와 벌초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헌신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돈을 들여 만든 조상의 땅이 싸움의 빌미가 된 것이다. 인륜이 땅에 떨어지면 짐승들이 사는 세상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일,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