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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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23-12-07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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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CSF 발전 연구원장/박철호(시인. 상담학박사) 

어느 동네에 “대방산 판관(判官)”이라는 무당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 할매를 ‘판관’이라고 불렀다. 그 할매의 증조할아버지는 발포 만호(萬戶)였고 할아버지는 적량 만호였다. 그 시절의 만호는 진(津)이 있던 지역의 책임자이다. 할매의 증조인 발포 만호는 지방 토호로 대단한 가문을 형성하고 살았다. 아버지는 적량진 소속 포대 군장(軍長)이었다. 이 무당 할매의 출생이 귀가 막혔다. 

조선 후기는 민란의 시대였다. 민란에 참여한 남자들이 비명횡사한 집이 한둘이 아니었다. 바닷가 해안마을은 고기 잡으러 나간 남자나 민란에 나간 남자가 부지기수였다. 그러니 동네마다 과부가 지천이었다. 그 당시는 남자가 없으면 집안은 쑥대밭이 되고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첩살이하는 일은 보통이었다. 그런 연유로 남자들은 몇 명의 첩과 숨긴 여자를 두기도 했다. 이 군장도 숨긴 여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풍채 좋고 집안 좋으니 여자 몇 명을 데리고 살아도 흉이 아니었다.

운 좋게도 그 군장이 숨겨둔 여인들은 각자 자기 집이 있었다. 둘째 여인의 남편은 아들 하나를 두고 민란에 나가 소식이 끊겼다. 3년이 지나자, 죽은 줄 알고 군장이 여인을 덮쳐 군장의 숨겨둔 여자가 되었다. 어느 날, 민란에 나갔던 그 여인의 남편이 거지 몰골로 돌아왔다. 그 당시에는 민란에 참석했던 사람은 잡히면 즉결 처분으로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었다. 이 사내는 며칠을 숨어 지내다가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또 봉기한다는 사발통문이 돌았다. 이번 봉기 장비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포대를 습격한다고 했다. 그 틈을 타서 도망하기로 했다. 

그날이 왔다. 아들 하나를 데리고 대방산이 있는 외딴섬으로 도망을 쳤다. 그런데 8달 만에 딸아이를 낳았다. 그곳은 민란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이 숯막을 짓고 숯을 만들었다. 부부는 낮에는 고기를 잡고 밤에는 숯막에서 일했다. 아들은 숯쟁이들과 뭍으로 나가 숯을 팔았다. 온 가족이 열심히 일한 덕에 먹고살 만 해졌다. 그 덕에 아들은 운 좋게도 뭍으로 장가를 갔다. 아버지는 대방 할매가 여나머살(10여세)이 되었을 때 죽었다. 아버지가 죽고 난 다음 어머니는 자기 씨를 발포 만호의 자손인 아무개 씨라고 했다. 그러니 혼인만큼은 잘 시켜야 한다고 했다. 

열여섯 되던 해에 적량 좌수의 중매로 첨지네 손자와 혼인했다. 남매를 낳았다. 둘째가 네 살 되던 해 남편은 무과를 치른다고 한양으로 갔다.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아이가 전국을 휩쓸던 홍역으로 죽었다. 과거 보러 간 남편도 행방불명이 되었다. 보부상을 풀어 전국을 수소문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다음 해에 대방산 산신령이 몸주가 되고 남편이 죽은 아이를 길잡이(명도, 冥道)로 삼아 신기가 발동했다. 굿 내림을 하지 않자, 신병(神病)이 생겼다. 첨지 영감은 며느리가 신기가 자주 발동하자 대방산 밑에 움막을 지어 며느리를 쫓아내었다. 

20대 중반 신병이 나서 난리를 치자 친정어머니가 큰 무당을 데려다 굿을 하고 신내림을 받았다. 신내림을 받은 지 3일째 되는 새벽녘, 대방산 숯쟁이들이 배에 숯을 가득 싣고 숯 팔러 가면서 무사 귀환을 위해 비손을 해 달라고 했다. 비손하고 집에 돌아와 깜박 잠이 들었다. 자기는 잠을 자는데 혼이 몸에서 빠져나와 잠자는 자기를 보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남편과 아이가 앞장서며 따라오란다. 궁궐보다 더 큰 대궐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신선처럼 생긴 사람이 용상에 앉아서 말하는데 쩌렁쩌렁 울려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이가 통역해 주었다. “너를 판관으로 삼으니, 세상으로 가거들랑 양심에 따라 판결을 해 주어라. 그렇지 않으면 산채로 불 못에 던져 고통 속에 살게 할 것이다.”

아이를 따라 또 어디로 간다. 세상에서 잘못 살다가 죽은 자들, 잘 산다고 큰소리치던 자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형벌을 받는 감옥을 지나간다. 어느 산은 가시나무로 가득 차 있고 뿌리가 뒤엉켜 온 산이 가시나무 산이었다. 그 속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경상도 의령 땅 누구를 찾아가서 제발 자기 욕을 그만해 달라고 전해 달란다. 또 어디를 간다. 혓바닥처럼 생긴 거대한 논을 소 세 마리가 쟁기질한다. 아무리 쟁기질해도 땅이 갈아지지 않는다. 갈고 갈고 또 갈아도 그대로이다. 그 땅속에서 아픈 고통이 극에 달한 소리가 들린다. 전라도 구례 땅 아무개 초시를 찾아가 “내 땅을 소작하는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달라”고 전해 달란다. 

구경을 다 하자 안개가 가득 낀 다리 입구가 나타났다. 점점 좁아지더니 낭떠러지였다. 툭 떨어졌다. 밖에서 장사 나갔던 숯막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이 세 밤이 지난 새벽이란다. 일어나자마자 행장을 차려 경상도 의령 땅 어느 동네로 갔다. 아무개라는 이름을 말하자 사람들이 “양심도 없는 그놈은 죽어서 온몸에 가시나무가 잔뜩 돋아날 놈”이라고 욕을 했다.

전라도 구례 아무개 초시도 찾아갔다. 할아버지가 죽은 지 40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마음대로 놀린 혓바닥을 쟁기로 갈고 갈고 또 갈아도 시원찮을 놈”이라고 욕을 한단다. 무당은 전할 말을 다 하고 돌아왔다. 그 후부터 송사 사건에 대해 점을 쳐주면 족집게처럼 맞았다. 처방을 해 주면 처방한 대로 결과가 나왔다. 사람들은 그를 ‘판관’이라고 불렸다. 그 무당은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은 양심의 가책을 받는 일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80이 넘도록 무당으로 살다가 죽었다. 

작금에 법과 양심이라는 말이 도마 위에 올랐다. 법과 양심은 심판의 기준이다. 심판관이 심판관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무슨 일에나 심판은 있다. 그러니 심판관이 되면 공명정대하게 심판을 해야 한다. 화인 맞은 양심으로 심판을 한다면 그 사람의 말로는 비참하게 끝나고 말 것이다. 세상이 바로 서고 공평한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심판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리가 보는 그들은 과연 공명정대한가? 심판관은 오직 법과 양심으로만 심판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