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호리 유적' 20년만에 베일 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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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5-06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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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마련 일반에 첫 공개

1988년 발굴된 창원 다호리 유적은 경주 조양동 유적과 함께 우리나라 원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 유적들은 공백기로 남아 있던 원삼국 시기의 역사를 복원하고 고대국가 성립 시기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를 주고 있다.

특히 기원 전후의 목관묘 72기와 옹관묘 2기가 발굴된 다호리 유적은 특이한 형태의 목관과 장례 절차의 확인으로 그동안 막연히 토광묘 또는 목관묘라고 부른 원삼국 묘제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 한 유적이다. 또 철기, 칠기 등 많은 부장품이 완벽한 상태로 출토돼 새로운 사실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다호리 유적 발굴 20주년을 맞아 다호리 유적을 일반에 공개하고 유적의 성과와 의의를 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우선,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된 칠기류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중국 칠기와는 제작기법이 전혀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 이용희 연구원은 “다호리 유적에서 나온 칠기류는 기원전 3∼2세기 광주 신창동 유적 출토 칠기 2점, 서기 2세기 무렵 경주 사라리 130호분 출토 칠초라는 칠기 1점과 제작기법이 상통한 반면, 평양 일대 이른바 낙랑유적에서 출토된 중국제 칠기와는 계통이 확연히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한반도 칠기들은 비교적 간단한 도장 방법으로 제작했다. 예컨대 한반도 칠기가 바탕칠 없이 목기 표면에다가 곧바로 옻칠을 한 데 비해 낙랑 유적 출토 중국제 칠기류는 직물을 먼저 입히고 옻칠을 여러 번 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조사 대상 칠기 숫자가 많지 않은 단점은 있지만, 초기 철기·초기 삼국시대 다호리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지역 칠기가 낙랑 혹은 중국의 칠기법을 단순히 모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다호리 유적에서 발견된 길이 2.4m, 너비 0.85m, 높이 0.65m의 통나무관은 20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장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관으로 화제를 모았다. 이 목관은 발굴 직후인 1988년 8월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 고 이상수 실장이 보존처리에 착수해 꼭 20년 만에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목관은 당시 350년 된 참나무에 쐐기를 박아 반으로 자른 후 내부를 철제 도끼와 자귀 등 도구로 파내고 다듬어 관의 몸체와 뚜껑으로 사용한 것이다. 또 무덤 안 통나무관의 위치와 다양한 부장유물의 출토 위치를 통해 원삼국시대 초기 장례 절차도 추론이 가능해졌다.

또 이 목관묘에서는 중국과의 교역 관계를 보여주는 오수전(五銖錢)을 비롯한 한(漢)나라 시대 동전과 이 지역이 기원 전후 무렵에 이미 문자생활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추측케 하는 붓까지 출토됐다. 또 알약이나 물약 형태로 만들어 이를 복용하면 하늘을 날아다니고 영원불멸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선약(仙藥)의 하나라는 운모(雲母)도 다량으로 발견됐다. 운모는 시신을 매장할 때 얼굴 부근에 안치했으며, 저승에서의 영생을 위한 선약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신선도교 사상이 한반도에는 2000년 전에도 널리 퍼져 있음을 추측할 수 있게 됐다.

이와 함께 제기(祭器)와 그 주변에서 발견된 과일 혹은 곡물류는 밤과 감, 율무 등으로 밝혀졌다.

다호리 유적 발굴단 일원이었던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이 유적에서는 그동안 확인되지 않았던 철기, 칠기, 목기 등 새로운 고고자료가 출토돼 당시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특히 원삼국문화가 토기, 철기, 묘제의 형식에서 한국식 동검 문화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 점도 큰 의의”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