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탑-碑도 현대적 조형미 갖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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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5-06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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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종(石鐘) 모양 일색이던 사리탑과 거북 받침에 용 또는 연꽃 무늬 위주인 비(碑) 모양이 바뀌어 가고 있다. 전통을 존중해 온 한국 불교 조형미술에 의미 있는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 같은 변화를 선도하는 공간이 8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동곡당(東谷堂) 일타(日陀) 대종사(大宗師)의 제자 모임인 ‘해인사 지족암 동곡문도회’는 지난달 19일 스님의 열반 9주기를 맞아 해인사 일주문 앞 비림(碑林)에서 사리탑과 비 제막식을 가졌다.

○ “새 양식 보여주는 격조있는 작품”

1929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일타스님은 14세 때 양산 통도사로 출가해 1949년 동산 스님을 계사(戒師)로 비구계를 받았다. 세계 불교사에 유례가 없는 내외척 41명이 출가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주일간 하루 3000배씩 기도한 후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손가락 네 개 12마디를 연지연향(燃指燃香)한 후 불퇴전의 정진으로 생로병사의 고통을 초월했다. 1954년 오대산 서대(西臺)에서 생식(生食)을 하며 6년간 눕지 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와 산문(山門) 밖으로 나가지 않는 동구불출(洞口不出)로 화두에 매진해 깨달음을 얻었다.

“다음 생애는 미국에서 태어나 더 넓은 세상을 상대로 포교를 하겠다”고 다짐했던 스님은 1999년 병환이 깊어지자 하와이로 요양을 떠난 지 1주일 만에 세수 71세, 법랍 58세로 열반했다.

7년의 준비 끝에 제막된 사리탑과 비는 조각가 이영섭 씨의 설계로,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꾀한 것이 특징. 사각형 화강암의 탑신 네 귀퉁이 하단에 네 마리 사자상(像)을 조각했다. 마치 사자가 사리탑 속으로 들어가는 형상이다. 스님의 행장(行狀)을 기록한 비는 조계종 지관 총무원장 스님이 글을 짓고, 서예가 시암 유형재 선생이 한 달간 두문불출하면서 일자삼배(一字三拜)로 글씨를 썼다. 비석 머리에는 꽃구름과 비천상을, 받침대에는 꽃구름 무늬를 새겼다. 미술평론가 윤범모(경원대) 교수는 “한국 불교미술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는 격조 있는 미술품으로 단순하면서도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 깃든 담박한 고졸미(古拙美)가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일타 대종사 비 위쪽에 있는 퇴옹당(退翁堂) 성철(性徹) 대종사의 사리탑은 더 파격적이다. “산은 산. 물은 물”이란 법어와 초인적 수행으로 20세기 한국 불교의 자존심을 지켜낸 스님은 해임총림 방장과 조계종 6, 7대 종정을 지냈다.

○ “한국 전통 부도의 아름다움 새롭게 해석”
1998년 성철 스님 열반 5주기에 제막된 이 사리탑은 재일 설치미술가 최재은 씨의 작품.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돼 있는 불보종찰(佛寶宗刹) 통도사 적멸보궁을 기본형으로 해 한국 전통 부도의 아름다움을 현대적 조형언어로 새롭게 해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맨 위의 구(球)는 완전한 깨달음과 참된 진리를 상징한다. 등을 맞대고 있는 반구(半球)는 활짝 핀 연꽃, 크기가 다른 정사각형의 3단 기단은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의 수행과정을 의미한다. 제막 당시 불교계 안팎에서 “너무 파격적이다”는 평가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