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의궤(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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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5-06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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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궤(儀軌)란 무엇인가?

조선시대의 자료 중에서 왕실 생활사의 구체적인 모습을 생생히 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자료가 ‘의궤(儀軌)’이다. ‘의궤(儀軌)’란 조선시대에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보고서 형식의 책이다.

의궤는 의식(儀式)과 궤범(軌範)을 합한 말로써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전통시대에 주요한 국가적 행사가 있으면 선왕 때의 사례를 참고하여 거행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주요한 국가 행사의 관련 기록을 의궤로 정리해 둠으로써 후대에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국왕의 혼인을 비롯하여 세자의 책봉, 왕실의 혼례, 왕실의 장례, 궁궐의 건축 등과 같이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하는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관련 기록을 모아두었다가, 행사가 끝난 뒤에 편찬을 담당할 임시 기구를 만들어 의궤를 편찬했다. 의궤는 문자 그대로 의식의 궤범을 만들어 뒷날의 사람들이 그 전례를 따르도록 한 것으로서 후대인들이 앞 시기의 의궤를 참고하여 국혼(國婚)이나 국장(國葬) 등 국가의 주요한 행사를 원활하게 치룰 수 있게 하는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의궤에 기록된 주요 행사는 왕실의 혼인을 비롯하여 왕과 왕세자의 책봉, 왕실의 장례, 제사, 잔치, 활쏘기, 태실(胎室)의 봉안,국왕의 행차, 궁궐 건축, 친농(親農) . 친잠(親蠶 ) 행사, 중국 사신의 영접, 대사례의식 등 국가나 왕실 행사 전반에 관한 것이었다.
2)의궤의 제작과 보관

의궤에 기록된 각종 행사를 위해서는 도감(都監)이라는 임시기구가 먼저 설치되었다. 도감은 행사의 명칭에 따라 각각 그 이름이 달랐다.

즉 왕실 혼례의 경우에는 가례도감, 국왕이나 왕세자의 책봉의식에는 책례도감, 왕실의 장례에는 국장도감, 사신을 맞이한 행사일 경우에는 영접도감 등의 이름을 붙였으며, 의궤 편찬은 임시기구인 도감에서 주관하였다.

행사를 마친 후 각 도감에서는 행사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전 과정을 날짜순으로 정리한 등록(謄錄)을 먼저 만들고 이를 정리하여 의궤를 제작하였다. 의궤는 보통 5부에서 9부를 만들었다.

국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의궤 1부는 직접 국왕에게 올리고, 나머지 의궤는 의정부, 춘추관,예조 등 관련 부서와 지방의 각 사고(史庫)에 나누어서 보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의궤의 표지에 '정족산상(鼎足山上)' '오대산상(五臺山上)' 등으로 쓰여있는 것은 각각 정족산 사고와 오대산 사고에 보내져 보관되어 온 것임을 보여준다.

의궤 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은 국왕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제작된 '어람용 의궤'이다. 어람용 의궤는 고급 초주지(草注紙)를 사용하고 사자관(寫字官)이 해서체로 정성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 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했다. 놋쇠 변철(邊鐵)2개, 원환(圓環)1개, 박을정(朴乙丁) 4-5개를 사용하여 장정하였으며, 비단으로 표지를 만들어 왕실의 품격을 한껏 높였다.

어람용이 아닌 일반 의궤에는 초주지보다 질이 떨어지는 저주지(楮注紙)가 사용되었으며, 검은 선을 두르고 삼베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정조대 이후 어람용 의궤는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보관하였으나, 1866년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침입을 받으면서 상당수가 약탈되었고 약탈된 의궤는 현재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각 사고나 관련부서에 보관되었던 대부분의 의궤와 1866년 이후 제작된 어람용의궤들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어서 의궤의 진면목을 연구하는데는 별다른 지장이 없다. 특히 서울대학교 규장각은 다양한 종류의 의궤 6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는 '의궤의 보고(寶庫)’이다.

3)의궤의 자료적 가치

의궤는 서양은 물론이고 같은 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전통이다. 의궤는 국가 행사를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겨 후대의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려는 목적에서 편찬되었으므로,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행사에 관한 일체의 사항이 기록되었다.

여기에는 행사에 동원된 인원의 명단과 신상 자료, 행사에 사용된 각종 물품의 크기 ·재료 · 색채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건물에 관한 기록이면 건물의 위치, 구조, 사용된 재료와 구입처에 관한 자료가 그림과 기록으로 정리되어 있다.

의궤의 기록은 국학 연구자들에게 다양하고도 상세한 사료들을 제공한다. 복식을 연구하는 사람은 반차도에 나타나는 인물의 복식을 꼼꼼하게 관찰할 것이고, 궁중 음식을 연구하는 사람은 잔치상에 오르는 음식의 종류와 재료에 관심을 기울인다. 전통 음악 연구자는 행사에 연주된 악장과 악기의 편성, 악기 그림을 살펴볼 것이고, 고건축을 연구하는 사람은 건물의 구조도와 재료 목록을 분석할 수 있다.

의궤에 나타난 각종 공문서나 물품의 내역은 조선시대 행정체계나 생활사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된다. 공문서의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관청들의 소속과 소관업무를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고, 행사에 동원된 인원에게 지급되는 임금과 물품 비용을 분석하여 당시의 물가 동향을 파악할 수도 있다. 의궤에 수록된 물품명에는 고유어가 나타나 국어학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의궤에는 치마(赤了),바지(把持),요강(要江),걸레(擧乃),곡괭이(串光尿) 등 고유어가 한자로 표기되어 있어, 조선시대 사람들이 사용했던 용어들을 확인할 수있다.

'의궤에서는 무엇보다 조선시대인들의 철저한 기록정신을 읽을 수 있다. 의궤에는 국가의식에 사용한 못 하나, 동전 한 닢까지 일일이 기록되어 있으며, 행사에 소요된 물품의 수량과 총비용을 비롯하여, 실제 들어간 물품과 사용 후 남은 물품을 되돌려준 사실까지 기록되어있다.

또한 행사에 사용된 물품의 크기 · 빛깔 · 재료가 기록되었으며, 반차도를 그린 화원의 이름, 각 물품을 제작하거나 수리한 장인들의 이름까지 기록하여 이들에게 책임감과 사명감을 부여하였다. 국가의 행사를 완벽하게 기록하고 물품 하나하나의 비용까지 정리한 것은 국가행사를 투명하게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외에 의궤에는 기록과 함께 행사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수록하여 당대의 상황을 입체적이고 생동감있게 우리들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의궤는 우리 전통문화의 생생한 현장을 직접 보여주고 있다.

자료. '규장각 명품도록'(서울대학교 규장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