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없는 세상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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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5-06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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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어느 날 갑자기 한 나라에 죽음이 사라진다는 설정이다. 말 그대로 ‘영생’이 보장된 것이다. 환호할 일이다. 인류의 비원은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 아니었던가. 그런데 정작 죽음이 사라지고 보니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교통사고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여느 때 같으면 벌써 죽었어야 할 사람이 신음만 내지르며 죽지 못한다. 병원은 환자들로 차고 넘치지만 빈자리가 나지 않는다. 양로원도 마찬가지고, 장의업자들은 파산에 직면한다. 종교인들의 위기감도 만만치 않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있을 수 없고, 부활이 없으면 교회가 존재하는 의미 없다는 사실’ 앞에서 망연자실할 따름이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모든 종교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유일한 근거는 죽음”이고, “우리가 먹을 빵을 필요로 하는 만큼 종교는 죽음을 필요로”하기 때문이다. 이 위기국면에서 로마 가톨릭교회 대표는 말한다.

“우리는 전국 기도 운동을 전개할 겁니다, 하느님께 죽음을 얼른 돌려 달라고, 그래서 불쌍한 인류를 최악의 공포로부터 구해 달라고 기도할 겁니다.”(45쪽)

일단 죽음이 사라진 환경을 상정해놓으니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들이 선명하게 잡힌다. 영원히 살고 싶은 희망과 절대 죽지 않는다는 공포 사이의 갈등이 사회를 혼란으로 몰아간다. 산자들을 위한 공동묘지라도 만들어야 할 판이다. 사실 “죽는다는 것은 적어도 아담과 하와 이후로는, 살면서 가장 정상적이고 평범한 일이며, 순수하게 일상적인 사실이고, 부모로부터 자식에게로 전해지는 무한한 유산 가운데 한 에피소드일 뿐”(173쪽)이었다. 죽음이야말로 삶이라는 단어의 성립을 가능케 하는, 삶을 지탱하게 만드는 힘이었던 것이다.

다시 일시에 죽음이 시작되자 죽지 못했던 이들이 일시에 죽어버리는, 대학살을 방불케 하는 혼란이 야기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정부는 ‘자주색 봉투’에 죽음을 예고하는 편지를 넣어 보내는 죽음이라는 ‘여성’을 찾기에 혈안이 되기도 한다. ‘전문가’들을 동원해 분석한 결과, 그 죽음의 인간화된 이미지는 ‘서른여섯 나이의 매우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 여자가 죽음을 예고하는 편지를 담은 자주색 봉투를 전달해야 할 대상인 한 첼리스트 남자를 사랑하기에 이른다. 죽음이 죽일 대상을 죽이지 못한 채 그와 한 침대에서 사랑을 나누는 바람에, ‘죽음’은 의미를 상실해버렸다. 그리하여 이 소설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같지만 다른 의미의 문장으로 시작되고 끝난다.

사라마구는 “어디를 가든 늘 뒤에 눈물 자국을 남기는 존재, 그러나 자기 것은 한 방울도 안 남기는 존재”인 죽음을 무릎 꿇게 한 존재로 “베토벤의 구번 교향곡처럼 기쁨, 인간 사이의 일치, 우정, 사랑의 조(調)로 작곡된” 음악, 그 음악을 연주하는 첼리스트를 내세웠다. 기발한 설정으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설파해나가던 노회한 작가도 결국 죽음조차 극복할 수 있는 덕목으로 진부한 듯하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는 진리, ‘기쁨 일치 우정 사랑’을 꼽은 셈이다.

죽음 앞에서 유희의 굿판을 벌이는 우리네 진도 다시래기처럼 이 소설 ‘죽음의 중지’는 죽음을 고맙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숨 쉬는 공기처럼 느끼게 하는, 슬프지만 꼭 필요한 삶의 한 과정임을 활자로 펼쳐내는 서글픈 농담이다.

마르케스, 보르헤스와 더불어 환상적 리얼리즘의 대가로 꼽히는 199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87). 쉽게 읽히지 않는 난해한 우화 형식의 작품임에도 ‘수도원의 비망록’ ‘돌뗏목’ ‘눈 먼 자들의 도시’ 같은 그의 작품들은 국내 독자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기발한 우화 형식으로 촌철살인의 깨달음을 주는 사라마구 특유의 기법과 사유의 힘이다. 그의 2005년 작품 ‘죽음의 중지’(정용목 옮김·해냄)가 국내에 소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