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부터 효정황후까지 500년…´효의 상징´이자 ´실천의 상징´

페이지 정보

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5-08 16:10

본문

태.jpg
조선은 51 8년 동안 왕조를 이어온 세계사에 드문 나라였다. 지난 6월 26일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한꺼번에 등재됐다. 이를 기념하여 조선왕릉을 시리즈로 다룬다.

왕릉은 천하명당 중에 명당을 골라 만든 사후 왕과 왕비의 세계에도 왕권의 위엄와 힘이 느껴진다. 왕릉의 규모와 각종 석조물 또한 예술품이며 자연을 거슬르지 않고 멋스럽게 단장된 자연환경이 길이길이 어어지기를 기원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6.25전쟁을 격으면서도 비교적 온전히 지켜져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왕릉을 답사하면서 전문가들을 객원기자로 모셔서 왕릉에 얽힌 역사와 시대상황, 뒷얘기를 구성해보고자 한다.

한반도의 중앙에는 한강이 흐르고 조선의 수도 한양이 자리하고 있다. 한양의 동쪽 방향에 조선의 건국 왕 태조가 영면해 있다.

오행으로 볼 때 동쪽은 봄을 가리키며 새로이 태어나는 푸릇함, 나무, 미래를 상징하며 새로운 해가 매일 떠오르는 방향이다. 이러한 곳에 조선을 건국하고 새로운 나라를 시작한 왕 태조가 잠들어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태조가 잠들어 있는 동구릉에는 열일곱 분의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있다. 1408년 태조의 건원릉 조성을 시작으로 동오릉, 동칠릉, 동구릉이 되었다. 동구릉이 된 것은 1855년 철종 때 익종(문조익황제)을 양주 용마봉에서 이곳으로 천장하면서 비로소 구릉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후에도 1890년 익종의 왕비인 신정왕후가 죽은 남편 곁으로 합장하였으며, 1904년에는 헌종의비 효정황후가 마지막으로 이곳에 장례를 치렀다.

1408년 태조에서 1904년 효정황후까지 500여 년 동안 동구릉은 국장이라는 이름으로 17분이 잠들게 되었다.

물론 이들은 조선의 국왕과 왕비로서 역사 속에서 한 부분들을 차지하면서 그 시대를 대표하며 호령하고, 세월을 품에 안으며 세상을 이끌어 가신 분들이기도 하다.

시대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시대의 국모로서 살아가신 그들은 살아서의 영광을 죽어서도 누리고 있는 셈이다.

왕실의 부모와 자녀로서 백성들의 모범이 되는 이들에게 부모는 이렇게 모시고 받들어야 한다는 표본을 보이는 곳이기도 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유교를 숭상하고 성리학적으로 살아가기를 희망하는 조선시대의 왕실과 선비들에게 조상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 절명의 것이기도 했다.

요즘은 부모를 대하는 태도나 생각의 정도가 많이 흐려져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살아 계신 부모는 물론이요, 돌아가신 부모 또한 각별히 살펴야 하는 보이지 않는 부모였다.
태1.jpg
동구릉의 건원릉 자리는 천하지지로 하늘이 낸 자리로 알려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명나라 사신이 방문하여 혹 가산을 만들어 이러한 자리를 조성 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했다고도 한다.

조선을 건국한 왕을 이곳에 모시며 사후에도 조선의 역사를 이어가는 자손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자신이 세운 나라의 역사가 오백년의 세월을 이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버지를 이곳에 모신 태종의 의도가 숨어 있다.

동구릉에 계신 몇몇 분들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흥미를 주고 있다. 심심치 않게 드라마 속에 등장하여 요즘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삶의 지침을 알려주고 있다.

건원릉에 계신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과 조선의 건국이라는 주제에 늘 출연하는 단골 배우다. 조선을 이야기 할 때 이를 빼놓고는 말이 되지 않으니 당연하다.

현릉에 계신 문종 또한 아버지 세종대왕과 함께 등장한다. 아들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하직한 그의 부인 현덕황후 권씨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안타까이 하직한 문종의 아들 단종으로 인하여 이들 부부는 조선의 백성들에게 가슴 아픈 생이손가락과도 같은 존재였다.

리틀 세종이라 할 만큼 아버지 세종을 많이 닮았던, 그래서 기대가 많았던 문종의 짧은 생애는 백성들에게 더욱더 안타까운 존재였다.

조선의 양란중 하나인 임진왜란이라는 시대의 큰 물줄기를 맞이하여 노심초사한 선조와 그의 정비, 계비가 목릉에 함께하고 있다.
나라를 세운지 이백년 만에 맞이한 국난을 극복한 그에게서 건국의 이름만큼이나 거대한 그의 힘을 느껴 볼 수 있다.

휘릉에 홀로 계신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는 아들 효종이 죽자 상복을 입는 문제로 당파간의 당쟁에 내몰려야 했다. 후사 없이 세상을 마감하고 단릉으로 홀로 계신 모습이 쓸쓸함을 자아낸다.

숭릉에는 현종과 그의 비 명성왕후가 쌍릉 형식으로 잠들어 있다.
병자호란 당시 아버지 효종이 중국 심양에서 볼모생활을 할 때 심양관에서 출생하였다. 큰아버지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아버지 봉림대군이 왕이 될 수 있었고 현종도 그 뒤를 계승 할 수 있었다.

혜릉에는 젊은 나이에 세상과 하직한 단의왕후 심씨가 잠들어 계신다.
그녀를 소개하자면 그의 시어머니인 장희빈의 등장이 필수다. 남편 경종을 병약하게 하고 후사를 둘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간 '시대의 악녀' 장희빈의 며느님이다.

혜릉과 멀지않은 곳에 경종의 아우이며 조선의 역대 왕 중 가장 오랜 재위기간인 52년을 자랑하는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가 잠들어있다. 조선왕들의 평균 연령이 사십대인 것을 감안하면 영조는 두 배를 살고 두 배 이상의 재위기간을 지낸 특별한 왕이다.

동구릉의 안쪽에는 경릉이 있다. 조선후기 순조의 손자로 아버지 효명세자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순조의 비인 할머니 순원왕후에게 수렴청정을 받은 왕 헌종과 그의 두 부인이 함께 있다. 능제에 있어 세 개의 봉분이 함께한 삼연릉이라는 형식을 만들어낸 분들이다.

효명세자는 순조의 아들로 아버지 순조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대리청정을 하는 중에 요절하게 된다.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아버지를 익종에 추존하였다. 그의 부인 신정황후는 흥선군과 함께 고종을 양자로 삼으며 조선의 왕위를 잇게 한 장본인 이다. 후에 고종이 황제 위를 칭하면서 황제와 황후가 되었다. 동구릉이라는 이름을 만들어낸 수릉의 주인공이다.

동구릉에 계신 분들은 조선의 역사 중간 중간에서 흐름을 이어 가고 있다.
조선의 역사와 더불어 왕릉제도 또한 이들을 보면 알 수 있으며 그들의 부침으로 세상의 이치를 알아갈 수 있다.

동구릉에 계신 분들은 백성의 어버이이며 왕의 부모이기도 하다. 충·효·예를 삶의 근간으로 삼는 조선에게 조상을 모신 동구릉은 효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왕들은 부모를 잘 모시며 백성들에게 효를 몸소 보여주는 실천의 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지난 6월 27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우리만의 것이 아닌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기록 등재되었다. 우리의 부모에 대한 효 정신을 세계에서도 뜨겁게 호응하고 있다.

조선의 42기 왕릉 중 40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세계 속에 조선 왕릉의 위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모두의 축제에 각자의 몫을 훌륭히 해내 만방에 우리의 정신적 가치를 알릴 그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