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들이 스스로 쓴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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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5-08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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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크게 어리석었고, 자라서는 병치레 많았다. 중간엔 배운 것이 얼마나 되었나, 늘그막엔 왜 외람되이 작록을 받았나? 배움은 추구할수록 아득해지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얽어 들었다. (중략) 시름 가운데 즐거움 있고, 즐거움 속에 시름 있도다. 승화하여 돌아 가리니, 다시 무엇을 구하랴"

이황(1501~1570)은 죽기 전 4언 24구의 글을 지어 자신의 묘비에 쓰도록 했다. 스스로 묘비명을 쓴 것은 자신에 대한 엄정한 평가를 한 것으로, 제자나 다른 사람이 쓸 땐 실상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장황하게 쓸까 봐 염려했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죽음에 대처하면서 삶의 의미를 생각했다. 인생의 어느 순간 죽음을 의식하고 이제까지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쓴 묘비명은 인간의 내면을 가장 진실하게 드러낸다.

고려시대 김훤부터 일제강점기 이건승까지 역사 속 인물 57명의 묘비명과 그들의 삶을 살핀 '내면기행'(이가서 펴냄)은 당시 상황을 바탕으로 그들이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총체적인 관점에서 풀어내 흥미를 끈다.

저자인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는 살아있을 때 자신의 무덤에 묻거나 무덤 앞에 세울 비명(碑銘)을 미리 작성한 자찬 묘비명 자료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그 속에 담긴 정신세계를 깊이 있게 분석했다.

조선 전기의 시인 남효온(1454~1492)은 자기의 주검을 상상하면서 삶을 반추한 시를 남겼다. "개미들은 내 입에 들어오고, 파리 모기는 내 살을 물어뜯으며 (중략) 다만 한스럽기는 세상 살았을 적, 끔찍하게 여섯 액운이 모였던 일. 용모가 추해서 여색을 가까이 못 한 것, 집이 가난해 술 충분히 못 마신 것"

정약용(1762~1836)은 죽기 14년 전 스스로 묘지(墓誌)를 지었는데 이 묘지명에서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자부하면서 정치인생을 방해했던 서영보에 대한 원망을 직접 드러냈다. 또 자기반성을 담으면서 남은 생애 동안 천명에 순응하겠다고 밝혔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울분을 느껴 경상도 영천에서 숨어 산 조상치는 자신의 묘비명에 "노산조 부제학 포인(逋人) 조상치 묘"라고 썼다. 단종 때 부제학을 지냈던 조상치는 수양대군이 등극하자 벼슬에서 은퇴하겠다고 청해 물러났으며 포인, 즉 도피한 사람이라 자처하며 부조리한 현실과 단절하려 했던 것이다.

"봉성 사람 금각은 자가 언공이다. 일곱살에 공부를 하기 시작해서 열여덟에 죽었다. 뜻은 원대하지만 명이 짧으니 운명이로다"

폐결핵으로 18세에 죽은 금각(1569~1586)이 죽어가며 남긴 글로 짧았던 삶만큼 너무 짧아 진한 여운을 남긴다.

농법서와 백과사전을 아우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편찬자로 잘 알려진 서유구(1764~1845)는 자신의 인생에서 낭비한 것이 다섯 가지나 되고 남은 것이라고는 거의 없다며 자괴감을 나타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죽음에 대한 사색은 곧 삶에 대한 사색이자 내 안의 숭고함을 되찾는 일"이라면서 "옛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빛을 찾아내 죽음으로부터 살아 돌아왔다. 슬픔이 저며오는 때도 있었지만 끝내 음울함 속에서 죽어가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자기의 죽음을 예상하면서 쓴 묘비명과 만시 속에는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것들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