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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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4-14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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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그런데 난 아니잖아.
난 이미 언니의 아픈 모습을 봐 왔고
이미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 버렸고
그래서 언니가 내 곁에 있건 없건 앞으로도 계속 슬퍼할 거잖아.
나, 언니에게 아무것도 아닌데 좀 초라한 모습을 보이면 어때.
사람이 만나면 헤어지게 되고 사람이 왔으면 떠나는 거지만 이런 식으로는 안돼.
언니가 준 돈, 많은 돈이야.
우리 그 돈으로 호텔 같은 병원에서 헤어지는 그 날까지 함께 지내면 되잖아.
나, 언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언니를 사랑해.
어서 메일 열어보고 내게 빨리 전화해야 돼, 언니.
오늘이 새해 첫날인데
지난 밤을 경찰서에서 보냈어.
새해 벽두부터 감옥에 가나, 했는데 아침이 되니 그냥 풀어주더라.
누군가의 가슴에 주홍글씨를 쓰려고 어느 술집에 쳐들어갔는데
그가 반항을 하는 바람에 페인트 한 통을 그냥 통째로 뿌려버렸지.
여기저기 피 같은 페인트가 퍼지고 서빙하는 아이들이 몰려오고
급기야는 뿌빠뿌빠 경찰차가 오더니 경찰 아저씨들이 들이닥치고
가까운 파출소에서 수갑을 찼다가 큰 경찰서에선 철창에 갇혔지.
자정쯤 전화가 왔는데
언니인가? 하고 재빨리 받았는데 페인트를 뒤집어쓴 그놈이더라.
경찰도 아니면서 경찰이 물었던 것을 그가 다시 물었는데
난 딱 한 마디만 하고 끊어 버렸어.
“너로 인해 너를 사랑했던 사람이 크레바스에 빠져 죽어가고 있다.”고

날 사랑한다는 언니.
내게 ‘고맙다’고 말했던 언니.
그래서 가진 것 모두를 내게 주고 간 언니.
오늘이 마침 새해 첫날이니 한 번만 더 날 기쁘게 해 줬으면 좋겠어.
제발 내 곁으로 돌아와 줬으면 좋겠어.
돌아올 수 없다면 전화를 주거나 메일이라도 보내 줬으면 좋겠어.
잘 있다고, 살아 있다고, 어떻게든 소식 좀 줬으면 좋겠어.
다시 돌아오기 위해 어느 병실엔가 누워 있다고 제발 소식 좀 줬으면 좋겠어.
여긴 땅끝마을이야.
보길도로 들어가는 작은 선착장.
나, 이틀을 보길도에 머물다가 방금 이곳으로 나왔어.
언니와 묵었던 바닷가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언니와 다녔던 곳들을 자전거로 훑고 다녔어.
차라리 없었으면 했는데 언니는 정말 그곳에 없었어.
다행히 언니는 그곳에 오지 않았나 봐.
아니야. 언니가 그곳에 왔는데 내가 못 찾았을 수도 있지.
언니가 그곳에 왔다면, 지금도 그곳에 있다면
언니는 내가 찾을 수 없고 그곳 사람들조차 찾을 수 없는
아주 깊고 푸른, 아무도 갈 수 없는 세상에 있겠지.
언니, 생각날 거야. ‘격자봉’ 너머 바다로 떨어지는 수직 절벽 끝 너럭바위.
우리가 그 섬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랐다가 그 벼랑 끝에 갔을 때 언니는 내게 말했지.
“여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잠깐 새가 되었다가 물고기가 되었다가 물고기의 밥이 되겠지. 아, 그러면 참 좋겠다. 저 푸른 바다 속에서 물고기가 장례를 치러주고 물고기가 제사도 지내줄 테니까.”
보길도로 달려온 건 그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야.
언니가 그 벼랑 끝에 갈까 봐, 언니가 새가 되고 물고기가 되기 전에 온 밤을 하얗게 지새워 이곳까지 달려온 거야.
언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나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차라리 언니가 물고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나도 그 벼랑 끝으로 가서 잠깐 새가 되었다가 물고기가 되었다가 물고기의 밥이 될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