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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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5-08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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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의 왕릉 가운데 비석이 있는 곳은 초기의 몇몇 왕릉뿐이다. 그 이유는 문종의 현릉에 비를 세우려던 세조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알 수 있다. 영의정 정인지가 “임금의 공업(功業)은 국사(國史)에 기록하는데, 왜 반드시 비석을 세워야 하느냐”며 왕릉의 신도비 건립 불필요론을 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조 건원릉의 문충공 권근, 태종 헌릉의 문숙공 변계량, 세종 영릉의 문성공 정인지가 지은 비문만이 있을 뿐 이후에는 묘비석 자체가 없는 것이다. 피장자의 무덤에 묻는 묘지석과 달리 묘비석은 지상에 세운다.

중국 후한 때 시작된, 생전에 무덤을 만드는 풍습이 한반도에 건너온 시기는 고려 때라고 한다. 이러한 풍습은 문인들 사이에 자신의 무덤(壽藏·수장)임을 알려주는 묘표(墓表)나 묘지(墓誌)를 짓는 관행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묘표에 운문이 첨가된 글이 묘비명이다. 묘표의 명문은 처음에는 단순히 무덤의 위치를 표시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근세로 오면서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는 상징으로 변질됐다. 명문장가의 글을 받고 명필가의 글씨를 받아서 큰 묘비를 세우는 게 유행이었다. 그러니 중국 당나라의 사상가 한유(768~824)처럼 명문장가들에게는 비문을 지어달라는 주문이 늘어섰다. 그 내용은 대개 집안의 내력을 열거하는 공치사였다.

근간 ‘내면기행’(심경호 저, 이가서·2009)에 소개된 57인의 묘비명(墓碑銘)은 자찬(自撰)이라는 점에서 그런 우려와는 거리가 멀다. 퇴계 이황의 자작 묘비명도 그 가운데 하나다. ‘태어나 크게 어리석었고, 자라서는 병치레 많았다. 중간엔 배운 것이 얼마나 되었나, 늘그막엔 왜 외람되이 작록을 받았나? 배움은 추구할수록 아득해지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얽어 들었다’는 글에서 강직하고 청렴한 그의 성품을 읽을 수 있다. 그가 생전에 직접 이 글을 지은 것은 사후에 문하생들이나 지인들이 자신의 삶을 지나치게 미화하지나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털끝만큼의 ‘과대포장’도 경계한 것이다.

후손들에게 자신을 깊이 각인시키려거든 영원히 썩지 않을 세 가지를 이루라는 말이 있다. 덕·공·언(德功言)이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이루어야 추하지 않은 이름으로 후세에 기억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말이다. 경제위기의 끄트머리에서 맞는 이번 추석 성묘길에 조상들의 묘비명을 다시 한번 새겨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