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의 유조

페이지 정보

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5-08 16:36

본문

원효와 같은 시대,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ㆍ재위 661~681)의 <유조(遺詔)>는 <삼국시기>에 전하는 임금의 유언으로, 한국 문학사에 남은 자서전의 여명이라 할 만하다. 문무왕은 태종 무열왕의 뒤를 이어 김유신과 함께 세 나라 통일을 경영했던 임금이며, 스스로 죽으면 동해 바다 입구의 큰 바위 위에 장사하라는 등의 유언을 따로 남긴 나라 사랑의 임금이었다.

'과인(寡人)'이란 겸칭으로 왕이 스스로의 생애를 회고하고 반성하며, 자기의 치세를 들어 지하의 영령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다 하고, 선비들에게 저버릴 바 없다고 가히 말할 만하다고 자평했다.

'과인은 국운이 분분하고 전쟁하는 시대를 당하여 서정북벌(西征北伐)하여 강토를 정하고, 배반하는 무리를 치고 손 잡는 무리를 불러들여 원근의 땅을 평정하여, 위로는 종사(宗社)의 돌보심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부자의 원한을 갚았다.

전쟁에서 산 자와 죽은 자에게 두루 상을 내리고, 내외에 골고루 벼슬을 내리고,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게 하고 백성들을 인수(仁壽)의 터전에서 살도록 하였으니…'(<유조> 중에서)

문무왕은 실제로 통일 전쟁 뒤에 당나라의 침략야욕에 끝까지 적대하면서, 삼국시대 때보다 세 배나 커진 강토를 경영하고 나라의 체제를 다잡았다. 그러기에 '스스로' "문득 큰 밤으로 돌아가는데(奄歸大夜)" 여한이 없다고 하고, 죽음에 임하는 당당한 모습을 뚜렷이 하였을 터이다.

그리고 "운(運)이 가고 이름이 남는 것은 고금의 법칙인데, 문득 큰 밤으로 돌아간들 무슨 유한이 있겠는가?"고 자문했다. 이런 사생관은 죽음이야말로 본래의 거처라고 하는 관념으로 오래 전부터 있어온 동양적 사생관이라 할 만하다.

여기서 '큰 밤'이란 죽음의 세계 곧 황천을 말하고 "여한이 없다"는 말은 남은 삶에 미련을 두지 않고, 평온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일 터이다.

그러나 "장례가 화려하다고 지하의 혼령을 건지는 것도 아니다"는 대목에 이르면, 앞에서 유한이 없다고 했던 체관(諦觀)과는 다른 머뭇거림이 느껴진다. 더구나 "고요히 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상하여 아프기 그지없다"는 대목에 이르면, 당당하던 제왕의 모습도, 유한이 없다던 사생관도 흔들리며, 죽음 앞에 선 나약한 한 사람의 고뇌가 표면화 한다.

더구나 "장례가 화려하다고 지하의 혼령을 건지는 것도…" 운운하는 대목은 벌써 지하의 혼령으로 바뀐 자신의 죽음을 꿰뚫어보는 체념을 감추지 않고 있다.

더구나 문무왕은 원근 땅을 평정하는 이 전쟁의 시대를 함께 한 김유신이 죽었을 때는 비단 1,000필과 구실(租) 2,000섬을 내려 장례에 쓰게 하고, 군악대 100명을 주어 후장(厚葬)하게 한 임금이었다.(<삼국사기> 김유신전) 일찍이 안자산(安自山)이 초기의 <한국문학사>를 체계 세우며, 이른 시기의 '산문'으로 이 글을 뽑아 실은 뜻을 이해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