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길은 같지만 추모객 길이는 다르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4-14 22:54

본문


결혼식은 부모의 사회적 능력을 과시하는 장소지만 장례식장은 자식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죽은 자를 추억하거나 애도하기 우해 참석을 하기도 하지만 장례식은 망자에 대한 추모보다는 살아 있는 자들이 살날을 위해 꼭 참석을 해야만 하는 날로 변해버렸다. 결혼식은 몇 시간 동안만 벌어지는 행사지만 장례식은 삼일 밤낮 시간에 구애 없이 추모객의 시간에 맞추어 참석할 수 있다. 그래서 장례식의 모인 사람들은 긴 시간 동안 서로에게 인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의 장소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경제적 능력이 뛰어난 자식들이 있는 망자의 장례식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그들과 다르게 부유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빈약한 자식을 둔 망자의 장례식은 조촐하다. 하지만 진정 망자를 애도하는 사람들은 그들이다.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

부유한 죽음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없지만 정승의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넘쳐 난다’는 속담처럼 능력 있는 자식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장례식에 참석해야만 한다.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죽은 자보다는 산자의 사회적 지위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엘 그레코(1541~1614)의 대표작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은 죽은 자의 후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의뢰된 작품이다. 전설에 의하면 신앙심이 깊었던 스페인의 귀족 돈 곤잘레스 루이스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이 열렸고 하나님은 성 스테파누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지상에 보내 백작의 장례식에 참여하게 했다고 한다.

1586년 산 토메 교구의 사제 안드레스 누녜스 데 마드리드는 경제적 이익을 챙기기 위해 장례식의 기적을 그려달라고 의뢰한다. 백작의 후손들에게 유언의 내용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1357년에 죽은 오르가스 백작은 임종하면서 매년 산 토메 교회에 기부하도록 유서를 남겼지만 16세기 후손들은 유언의 내용을 거부했다.

엘 그레코는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14세기의 일어났던 일을 재현하지 않고 인물들에게 당시 유행하는 옷을 입혀 동시대의 사건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작품은 화면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아래쪽은 장례식이 사실적으로 묘사됐으며 상단부 천상은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흐릿하게 묘사했다. 하단부 갑옷을 입고 죽은 사람이 오르가스 백작이다. 그의 머리 위에 황금색의 아름다운 주교복을 입은 사람이 성 아우구스티누스며 부제복을 입고 백작의 다리를 안고 있는 사람이 성 스테파누스다.

화면 오른쪽 레퀴엠을 읽고 있는 사제가 이 작품을 의뢰한 안드레스 누녜스이며 화면 왼쪽 손가락으로 오르가스의 기적을 가리키고 있는 어린아이가 엘 그레코의 아들 조르주다. 이 작품의 주제를 설명하는 조르주는 후에 엘 그레코의 조수가 된다.

상단부 맨 위에 예수 그리스도와 붉은색의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가 천상의 중심에 있다. 화면 중앙에 천사가 백작의 작은 영혼을 안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백작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지 않아 아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성모 마리아 옆에 열쇠 꾸러미를 들고 있는 남자가 성 베드로다. 천국을 지키고 있는 성 베드로는 백작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엘 그레코는 고향 그리스를 떠나 스페인 국왕 펠레페 2세의 궁정화가가 되기 위해 툴레도에서 활동을 한다. 그가 툴레도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제작된 이 작품은 실제로 오르가스 백작의 무덤에 걸 예정이어서 구도를 그 계획에 맞추어 잡았다.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 1586~1588, 캔버스에 유채, 480×360, 톨레도 산 토메 교회 소장

◇귀스타브 쿠르베의 [오르낭의 장례식]

가난한 사람의 죽음

원하지 않아도 언젠가 가던 길을 멈추어야만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죽어서도 가난할 수밖에 없다.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한 가난은 대물림되기 때문이다.

뛰어난 인재라도 환경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고 환경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재는 먹고 사는 것에 급급해 사회적 지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가난은 인재의 능력을 개발할 기회조차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장례식은 망자의 애도를 넘어 자신의 능력 부재에 대한 자격지심까지 더해준다.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의 ‘오르낭의 장례식’은 농민의 장례식을 묘사한 작품으로서 1850~51년 살롱전에 출품해 사실주의 논쟁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그 이전의 귀족들을 그린 이상화된 낭만주의 작품과 다르게 가난한 농민들의 비참한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마을 시장, 교구의 사제, 지방 판사, 지방의 소부르주아, 공증인, 그리고 노동자, 포도 재배자, 날품팔이꾼 등 실물 크기의 인물들 40여 명이 등장하고 있는데 쿠르베는 농민들의 삶을 미화시켜 묘사하지 않고 그대로 표현했다.

쿠르베는 쥐라 산중의 오르낭 마을에 있었던 농민들의 장례식을 묘사하기 위해 묘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아틀리에에 하나씩 불러 그렸다. 쿠르베의 사실주의 정신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쿠르베의 이 작품은 고향 오르낭에서 일어난 장례식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쿠르베는 이 작품을 포함해 1850년 사실주의 그림 9점을 출품한 살롱전에서 스캔들이 일어난다. 9점의 작품들은 낭만적인 정서를 배제하고 농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기존의 역사화에서 볼 수 있었던 개념에서 벗어난 그의 사실주의 작품은 회화사의 커다란 스캔들이었다.

쿠르베는 살롱 전시목록에서 ‘오르낭의 장례식’이 작품에 대해 ‘오르낭의 장례식에 참가한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인물들의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오르낭의 장례식’, 1849~1859년, 캔버스에 유채, 315×668,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