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궤 조선조는 기록의 왕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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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4-14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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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엔 몇년 몇월 며칠에 누가 무엇을 보고하고 왕
이 뭐라고 답하거나 명령했는지 소상하게 적혀 있다.

왕과 신하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구체적 사안의 처리 과정은 어땠는지,
사건의 전말은 무엇이었는지 등을 고스란히 남겨놓은 것이다.

꼼꼼한 기록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실록과 일기로 정치·행정사를 담아냈다면 각종 '의궤(儀軌)'를 통해 당대의 사
회·문화사를 속속들이 드러냈다.

의궤란 의식(儀式)과 궤범(軌範)을 합친 말.왕가 혼사나 세자 책봉,잔치,장례
등 국가와 왕실의 대규모 행사를 마친 뒤 만든 백서였다.

현재 남아있는 의궤는 600여종.서울대 규장각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 국
내에 있는 것도 있지만 프랑스와 일본에서 돌아오지 못한 것도 상당수에 이른다

1922년 조선총독부가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 기증한 72종이 그대로 일본에 있는
데다 프랑스가 병인양요 때 가져가 반환하지 않은 강화도 외규장각 고문서 대부
분도 의궤인 까닭이다.

의궤는 종류도 다양하지만 그 세밀함은 보는 사람 누구라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정조의 화성 축조공사 내역을 담은 '화성성역의궤'엔 석수 642명 목수 335명의
이름까지 들어있다.

고종의 즉위 40주년 기념잔치를 다룬 '진연의궤'엔 음식 4만8500여 그릇에 1백
57만5천4백42냥이 소요됐다고 돼 있다.

이런 의궤가 고려대장경판·제경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
게 됐다는 소식이다.

기록한다는 것은 투명성을 담보로 한다.

거리낄 게 없어야 정확한 기록이 가능하다.

선조들은 공사에 쓰인 벽돌 한장 값까지 기록했는데 근래의 국정담당자들은 툭
하면 자료가 없다는 마당이다.

급변하는 세태일수록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

의궤를 남긴 건 후대의 담당자들이 시행착오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
였을 것이다.

세계 기록유산 등재를 계기로 국내외에 흩어진 의궤의 회수에 힘쓰는 것은 물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모두 확실한 기록보존에 힘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