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위패 봉안' 사대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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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4-15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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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대주의(事大主義)라는 말은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내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중세 한반도의 통치자들은 그것을 별로 부끄럽거나 자존심 상하는 일도 여기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중국과 한반도의 문명사적 관계에 질적 변화를 가져온 일이 벌어졌다. 바로 그 한글 창제 사건이다. 세계 문명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그 문자 발명 사건은 중국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이었다. 더불어 그것은 조선의 통치 집단인 사대부 계급을 깜짝 놀라게 했다. 따라서 집현전의 일부 소장파 학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세종의 '문자 개발 프로젝트'에 제동을 걸며 세종과 사대논쟁을 벌이게 된다. 그 앞자리에 선 이가 바로 최만리였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세종 즉위 초기에도 이미 한 차례 사대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바로 개국시조 단군 위패 봉안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고려는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과, 중화 문명의 전달자인 기자(箕子)를 함께 받들었다. 이에 반해 고조선의 후예임을 표방한 조선은 단군과 기자를 함께 받들었다. 일찍부터 기자는 한반도 문화를 창시한 시조로 숭상 받고 있었지만, 단군은 주로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명맥을 이어오던 터였다. 그러나 삼국유사를 필두로 고려 말에 민족의식이 싹튼 결과, 단군을 국조로 모시게 된 것이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은 단군의 위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평양에 있던 기자 사당에 단군의 위패도 함께 모시도록 했다. 그런데 이때도 기자의 위패는 북에서 남으로 향하고, 단군의 위패는 동에서 서로 향했다. 즉 기자보다 단군을 한 단계 아래에 둔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단군을 기자보다 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단군 사당을 따로 짓게 했다. 그리고 위패명도 '조선후(朝鮮侯)'에서 '조선단군'으로 바꾸게 했다. 단군을 제후의 반열에서 독립군주로 격상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때, 사대의 예를 철칙으로 여기는 조선의 사대부들은 펄쩍 뛰었다.

"기자의 사당에 단군을 함께 모시는 것이 당연한 일인 줄 아옵니다. 이는 국초 이래로 정해져 내려온 전례이옵니다."

최만리의 강경한 반대상소였다. 이에 세종은 답한다.

"우리나라 시조는 단군이 아니신가. 또한 단군은 주 무왕보다 천이백 년이나 앞선 요임금과 같은 때에 개국한 바, 그 시기를 따져 봐도 기자의 사당에 함께 모시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아니하다."

할아버지뻘인 단군을 기자와 함께 배향할 수는 없다는 것이 세종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최만리는 다시 간곡하게 청했이다.

"하오나 전하. 이와 같은 일을 중국에서 알게 되어 그 연유를 문책해온다면 어려운 일이 생기게 될까 심히 염려되옵니다."

최만리의 주장은 조선의 전통적인 사대부들이 가지고 있던 관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아서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세종은 사대부들의 그런 반발을 익히 예상했을 터였다. 그래서 세종은 답한다.

"나라의 국조를 사당에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일이 어찌 시빗거리가 된다는 말인가."

그리하여 세종은 결국 자신의 생각대로 단군사당을 따로 짓고 기자 사당에 있던 단군의 신위를 옮겨 모시게 한다.
사실 단군 위패 봉안을 둘러싼 세종과 최만리의 이견은 제대로 된 논쟁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최만리는 관습과 고정관념을 밑절미 삼아, 중국과의 사대교린 관계에 혹시라도 금이 가지 않을까 염려했고, 그 마음을 임금에게 고했던 것이다. 반면 세종과 일부 신진사대부들은 그러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민족적 정기를 세움으로써 내적 질서를 강화하려 했을 터다. 어쨌든 단군 위패 봉안을 둘러싼 논쟁은 이후 한글 창제에 대한 격렬한 사대논쟁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