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대륙을 지배한 고려여인 '기황후'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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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4-14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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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궁녀로 태어나 원나라에 끌려가 제국의 황후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

역사평론가 이덕일씨에 따르면 그녀가 원나라에 바쳐지는 공녀(貢女)로 결정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비참한 인생을 동정했다고 한다. 공녀로 선발되면 우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는 것. 하지만 그녀는 세계를 지배하는 원나라이니 만큼 더 많은 기회가 있으리라고 판단했고, 그녀를 눈여겨 본 고용보(원 황실에 포진한 고려 출신 환관들의 대표)에 의해 1333년 순제의 다과를 시봉하는 궁녀가 돼 곧 순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황후는 순제의 총애를 받고 황제의 정실부인이었던 타나시리의 일족을 축출했다. 그리고 타나시리에게 사약을 내린 후 두 번째 황후 후보로 떠오른다. 기황후는 1339년 황자 아이유시리다라를 낳았으며, 이듬해 세계를 지배하는 원제국의 제2황후로 책봉된다. 황후가 된 뒤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막대한 권력을 행사한다. 이덕일씨는 그녀가 원제국의 제2황후로 책봉된 데는 철저한 현지화 전력이 있었다고 말한다.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징기스칸을 모신 태묘(太廟)에 바친 후에야 먹었을 정도로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구사했고 이런 전략이 먹혀들었다는 것.

제1황후가 있었지만 자기 능력으로 황후가 된 기씨의 위세는 제1황후를 능가했고 1353년 14세의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책봉하는 데 성공한다.

이덕일씨는 "기씨는 이렇게 장악한 권력을 누구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며 "공녀였던 그녀는 힘없는 백성들의 고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원사 후비열전'은 1358년 북경에 큰 기근이 들자 기황후가 관청에 명해 죽을 쑤어주고, 자정원에서는 금은 포백·곡식 등을 내어 십여 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의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말한다.

기황후는 원제국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원 황실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고 보고 무능한 황제를 젊고 유능한 인물로 교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기황후는 황태자를 황제의 자리에 즉위시키려고 했지만 순제는 크게 반발했다. 순제라는 무능한 최고경영자를 둔 원나라는 급속히 약화됐다. 원제국은 1366년 주원장에게 대도 연경을 빼앗기고 북쪽 몽고초원으로 쫓겨가야 했고 기황후의 전설도 그렇게 잊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