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별과 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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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6-02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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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산대 최청자강사
 
죽음의 정의와 관련한 수많은 논의 속에서, 죽음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패배를 모른다. 우리는 매일 죽음의 소식을 접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죽음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생활하고 있다. 이러한 일상의 과정에서 갑자기 가까운 이의 죽음을 대하게 되면 그때에 비로소 죽음에 대한 절박한 물음을 묻게 된다.“삶이란 무엇인가”그리고“죽음이란 무엇인가”의 질문이 그것이다. 그리고 눈앞에 닥친 죽음으로 인해서 깊은 상실감을 경험하게 되고,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에 대한 불안과 죽은 이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사별의 깊은 슬픔이 유족을 엄습하게 되는 것이다. 얼 그롤먼(E. Grolmun, 2000)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충격,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정신적 혼란, 분노, 죄책감, 육체적 고통, 좌절감이 뒤섞여서 찾아오며, 그러한 감정들이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남아서 유족의 마음을 휘젓는다.

이러한 죽음의 충격에 대해 전통사회는 사회공동체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 공동체의 노력으로 극복하고자 한 반면, 현대사회에서는 죽음 자체까지도 개인화되고 고립화되어졌으며, 더욱이 상업화의 과정으로까지 진행되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임종은 병원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의료진도 죽음 앞에서 자신들의 무기력을 상기시키게 되기 때문에 죽음의 문제를 꺼리게 되는데,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무기력과 불완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죽음까지도 제어하고 통제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고 보인다. 현대의학의 기술 진전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없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도 하였지만, 죽음을 부인하는 이러한 문화는 사별슬픔의 문제를 죽음의 문제처럼 거부하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죽음으로 인해서 일상생활이 방해를 받거나, 사람들의 면전(面前)에서 슬픔의 감정을 표시하려 하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오랫동안 보이면, 마치 자제력이 없거나 유약한 사람처럼 취급을 당하기가 쉽다고 느낀다. 그래서 여전히 행복한 것처럼 가장(假裝)하면서 죽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리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오늘날 죽은 이를 떠나보내고 남겨진 유족들이 홀로 방치(放置)되는 일은 매우 흔한 일이며, 지극히 개인적이며 자연스러운 문제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극복되지 못한 슬픔에 대해서 말할 때 가장 유명한 사례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녀는 슬픔을 40년 동안이나 가지고 있으면서 검은 색 상복(喪服)을 죽을 때까지 입었다고 한다.
처리되지 못한 슬픔의 과정은 살아 있는 사람과의 인간관계(人間關係)도 부정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별을 경험할 때 자기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는 것은 슬픔을 적극적으로 처리해나가는 것을 방해하며, 슬픔을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하면 슬퍼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폭발적으로 튀어나와서 그를 손상시키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별을 경험한 후 몇 달이나 일 년 이후에도 신체적인 질병이나 정서적인 질병에 걸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슬픔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수동적인 감정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며, 이제는 적어도 사별슬픔과 관련하여서는 적극적인 과제로 해석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과거 전통적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또는 정보화라고 일컬어지는 현대사회로의 빠른 진행에도 일정부분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며, 그러한 급속한 사회변화가 상·장례의 변화를 유도하고 조장하였음은 자명한 것이다.

이러한 슬픔의 문제에 관해 프로이드(S. Freud)는 소위 ‘슬픔의 작업’이라고 하는 특별한 용어를 만들어 냈는데 이 말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작업을 수행해야 되는 과정임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픔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오히려 인격을 성숙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면 슬픔의 과정이 가지고 있는 창조적인 가능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슬픔의 과정도 단순히 역기능적인 역할에 제한되는 것은 아니며, 순기능적 역할도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별슬픔의 적응이 중요한 것은 알폰스 데켄(Alfons Deeken,2006)의‘사별슬픔이 극복되지 못하면 병으로 발전할 줄을 알면서도 거의 무방비 상태로 지내고 있다’는 그의 주장은 설득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무방비상태의 방치(放置)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진다. 과거 전통사회의 가치관과 현대의 가치관이 다르다고 해서 사별 슬픔의 문제가 일거(一擧)에 개인적인 문제로 전락된 것에는 우리 자신에게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이는 전통의 계승적인 차원에서 수용한 전통상·장례의 절차를 단지 기능적 수용에 그침으로써 의례의 순기능적 역할에 무관심하였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사별슬픔의 과정에 대한 교육을 통하여 암환자나 심장병환자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알폰스 데켄(Alfons Deeken)은『인간의 죽음과 죽어감』에서 사별슬픔은 열 두 단계로 겪을 수 있다고 하였다. 충격과 무감각, 부인, 겁에 질려 허둥대는 것, 분노와 불의에 대한 느낌을 갖는 것, 적개심과 한, 죄책감, 환상을 만들고 환각 속에 빠지는 것, 고독과 우울에 빠지는 것,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무감정 상태로 빠지는 것, 체념하고 수용하는 것,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어 유머를 회복하는 것, 회복단계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자신의 정체성을 얻는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슬픔의 기간은 얼마나 가는 것이 정상적인 것인가. 정상적인 슬픔이 병적이 되는 것은 결국 죽은 사람이 어떻게 죽었느냐의 문제와 죽은 자와의 인간관계가 어떠했으며 그 질은 어떠했느냐와 같은 요인(要因)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임종자가 암으로 서서히 죽어갔다면 당사자가 죽기 전에 가족들은 이미 ‘예상되는 슬픔’을 오랫동안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 사고로 급작스럽게 죽게 되면 가족들은 그 충격에서 오는 슬픔을 벗어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특히 자식을 잃는 것은 특별히 상처가 심해 이런 경우 부모들은 자신의 배우자를 잃었을 때 보다 훨씬 긴 기간을 슬퍼하게 된다. 이런 충격의 경우 초기 단계는 며칠이나 일주일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러나 일주일 이상 슬픔이 지속되면 이 슬픔의 과정은 정상 상태를 벗어났다고 봐야 한다.

물론 슬픔의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그 지속되는 시간표를 짜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인데 그것은 상황에 따라 그 애도하는 시간에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친지를 잃은 사람이 회복 상태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대부분 일 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 정도가 지나면 당사자들은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어나가게 되는데, 1년이 지났는데도 상처를 처리하지 못하고 앞에서 본 슬픔 과정(알폰스 데켄의 12단계)의 1단계에서 9단계 사이에 머물러 있으면 이때는 전문가의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영국이나 미국의 사례조사를 보면 슬픔의 과정은 과부나 홀아비가 된 경우에 2년이나 3년 정도 간다고 하는데, 슬픔의 지속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일정한 시간 동안만 지속되는 기본적인 슬픔과, 일생동안 지속되는 경우도 있는 슬픔-특히 배우자를 잃었을 때-을 확실하게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슬픔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은 자기 스스로가 자원봉사자가 되어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슬픈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으로 이는 자기 자신의 고통만을 생각하고 자기 내면만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웨스트버그(Westberg)는 그의 저서 『Good Grief』에서 슬픔의 진행과정을 다음과 같이 10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쇼크와 부정(shock and denial)이다. 쇼크와 죽음 사실의 부정은 비극적 손실에서 보호해 주는 방어기제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마치 아무도 죽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사람의 뇌가 극도의 고통이 갑작스럽게 찾아올 때 그것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둘째, 감정의 분출(emotions erupt)인데, 통곡, 외침 또는 한숨은 이 단계를 나타내 준다. 상가(喪家)에 가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아이고 아이고...”하고 곡(哭)하는 모습도 볼 수 있지만, 너무나 큰 비탄에 잠겨 넋을 놓고 우는 광경을 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쇼크, 부인(否認) 그리고 통곡(痛哭)이 순환적으로 반복되기도 한다. 상(喪)을 치르는 3일 동안 조문객을 맞으며 웃으며 얘기를 하다가 곧 영정 앞에서 울다가 기진하기도 하고, 다시 자신을 찾는 조문객을 응대하기도 하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셋째, 화(anger)를 내는 것인데, 분노는 이유가 있어서 생기기도 하지만 이유 없이 분출되기도 한다. 사별이 초래(招來)하는 심리적인 고통이 심하면 고인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넷째, 질병(illness)이다. 사별에 의한 큰 슬픔은 스트레스를 가져온다. 사별의 비통함은 스트레스와 관련된 여러 가지 질병을 유발하기도 한다. 감기, 독감, 위장병, 신경성 두통, 궤양 그리고 고혈압은 ‘상실’후에 흔히 발생하는 질병이다.

다섯째, 공황(panic)이다. 여러 가지 질병이나 심리적 장애들이 우리를 공황 상태로 내몰기도 한다. 공황상태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오는 공황을 심장마비로 오인(誤認)하기도 한다.

여섯째, 양심의 가책(guilt)이다. 고인에게 ‘~할 걸’, ‘~하지 말 것을’하고 후회와 자책에 빠지는 단계이다.
이런 자책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일곱째, 우울과 외로움(depression and loneliness)으로 엄청난 슬픔과 외로움이 자주 발생한다. 우울과 외로움은 10단계 중에서 가장 오래 머무는 단계이다. 여덟째, 고통으로 되돌아가기(reentry difficulties)이다. 남은 이들은 죽은 이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슬픔을 곱십는다.

배우자를 사별한 사람은 배우자의 유품을 보며 눈물 속에서 지내고, 모임이나 여행 등의 제안에도 응하지 않는다. 이런 일이 사별 후 1년이나 2년간 지속되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아홉째, 희망(hope)의 단계이다. 사별의 슬픔과 추억은 아직 남아 있지만 자신의 삶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겠다고 보는 가능성을 생각하는 단계이다. 마지막 열 번째 단계는 현실 긍정하기(affirming reality)이다.

사별하기 전 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자신의 생활을 되찾게 된다. 슬픔의 기억들은 남아 있지만 새로운 삶으로의 적응이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