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준비교육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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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6-02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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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산대 최청자강사
 
현재의 죽음은 우리의 실존적 유한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적절하게 치료, 혹은 대응되지 못한 질병이나 사고 때문으로 설명된다. 우리는 우리의‘때’가 다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다. 인간의 필연적 유한성은 이렇게 피할 수 있는 그리고 통제가 가능한 여러 원인들로 해체된다.
나아가 임종과정과 죽음의 시간에까지 의학의 통제영역이 확장되면서 우리는 스스로, 혹은 가까운 이들의 죽음에 대해 그가 언제,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그가 죽은 것으로 판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죽음은 더 이상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니라 결정되고 통제되어야 할 사안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신(神)의 선물이 아니며, 오히려 기술의 선물이 되었고, 죽음 그 자체를 아직 물리치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임종과정은 이제 과학기술적인 통제 아래에 놓여 있다. 자연사라고 이름 붙일 수 없고 모두 병이 원인이 되고 사고가 원인이 되는 것은 사망원인의 통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오늘날의 죽음은 고독감과 무책임 속에서 무심히 진행되고 있다. 이제 죽음은 의사와 진료 팀의 결정을 통하여 획득된 기술적 현상으로서 초상(初喪)의 슬픔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조작을 통해 처리되어야 하는 사건이 되었다. 죽음에 대한 풍부한 예식(禮式)은 몰락하고 뭐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을 만큼 무의미(無意味)한 사건이 되어 버렸다. 죽음도 이제 내적 체험(體驗)의 세계가 아니라 과학적 지식과 기술적 상거래의 대상이 된 것이다. 죽음이 일상화(日常化)되고 사물화(事物化) 되면서 정신적인 죽음의 의미는 축소(縮小)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은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에 의해서 생활환경,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종래와는 크게 다른 사회의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의료와 과학기술의 진보와 외래문화의 접촉으로 인해서 죽음에 대한 관념도 전통적 개념과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사회가 날로 산업화·도시화· 핵가족화·개인화 되면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고립되고 환자들이 친근한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병원으로 옮겨져서 고독하게 기계에 둘러싸여 죽음 유명한 정신의학과 죽음학의 전문가인 퀴블로 로스(E. Kubler Ross)는 『사망과 임종에 대하여』(On Death and Dying)의 책머리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많은 측면에서 두려움과 혐오감을 준다는 사실이다. 즉 더욱 고독하고 기계적이고  비인도적이라는 사실이다.···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고립되고 인간미가 없어지는 것은 불치병 환자들이 친근한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쫒겨 나서 급히 응급실로 옮겨지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을 맞이하게 되었다.

죽음은 절대 패배를 모른다. 영원한 것 같은 삶 앞에서 인간은 한 순간 죽음이 악수를 청하면 힘없이 마주하게 된다. 진정 삶의 방식에 의해서 죽음이 결정되는 것이라면 의미 없는 죽음앞에서는 삶 또한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한 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가 있을 것인가?

 지난 9월부터 11월까지 관악노인복지관에서 죽음준비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매주 수요일 오후 1시부터 강의가 시작된다. 각 주차별로 전문강사가 진행을 한다. 필자는 6주차 진행을

맡았다. ‘아름다운 이별 준비하기’ 즉 마지막까지 품위있게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먼저 가는이, 가신이를 아름답게 배웅하자는 것이 목적이다. 이미 사별을 경험한 분들이 많아서 각자의 사별경험을 나눌 때는 눈물바람이 불었다. 각자 경험한 사별슬픔의 강도는 다르다. 특히 작년에 자녀와 사별한 분의 역동이 커서 모두들 마음으로 위로를 하며 함께 눈물을 보이기도 하였다. 왜 지난 일을 들추어서 마음을 아프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사별로 인한 슬픔은 그 고통을 바로 통과를 해야 치유의 장이 열린다. 즉 충분히 슬퍼하고 슬퍼해야 한다. 울면 안되니까 또는 참아야한다고 해서 슬픔을 노출하지 않고 가슴에 안고 살아간다면 보이지 않는 병이 자라게 된다. 함께 울고 웃으면서 진행된 강의는 오히려 죽음을 이야기 함으써 남은 삶을 더욱 의미있게 살아내어야 함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모두들 서로 위로하고 희망을 이야기하며 웃었다. 진심으로 다가서서 안아주며 다독여주는 모습에서 서로의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별을 경험하지 않은 삶은 없다. 누구도 사별하지 않은 사람은 없지만 어떤 사별을 경험하였느냐에 따라서 가슴 한 켠이 아리도록 잊지 못하고 힘들어할 수 있는 것이다.
 아침 눈을 뜨면 뉴스에서 거의 매일 접하는 죽음이지만, 지난 주에는 내 가까운이의 자녀가 스스로 목숨을 놓았다고해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베르테르 효과라는 말도 있지만 꼭 그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연예인이 자살을 한 것 보다 더 크게 마음을 흔들었다. 아버지는 땅을 치며 통곡을 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얼굴이 하얗게 되어 망연히 앉아 있었다. 어떤 말로도 위로를 할 수 없어서 그저 손을 잡고 함께 울고 말았다. 왜 그렇게 부모앞에 불효를 하면서 또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놓고 가야만 했는지... 함께 조문을 간 사람들도 말이 없었다.

 필자는 이제 ‘죽음을 준비하자’는 구호를 누구에게든지 던지고자 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는 단계를 지나서 ‘반드시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는 우리 모두가 죽는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죽음에 이르게 되면 마치 아무런 준비 없이 수험장에 도착한 수험생과 같다. 가는 사람도 남는 사람도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으니 경황도 없을뿐더러 웰다잉은 더구나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잘 살아야 잘 죽는다고 쉽게 말하지만 잘 먹고 잘사는 것을 준비하는 것 이상으로 잘 죽기위하여 죽음준비교육을 받아야 한다. 죽음준비교육은 비단 노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죽음준비교육은 현재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 예컨대 자살문제, 청소년 문제, 가족 갈등문제, 고령화 사회에 따른 노인문제 등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죽음준비교육은 효(孝)와 예(禮)의 적극적인 실천의 장으로 이끌게 되며 건강한 사회와 국가의 발전의 원동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삶 못지않게 소중한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 대할 때 우리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