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례의 제도화된 애도 - 임종(臨終)과 초혼(招魂)

페이지 정보

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6-02 14:07

본문

최서.jpg

 
 
 
 
 
 
 
 
동부산대 최청자강사
 
죽음과 죽음의례의 상호관련성의 문제에 있어서 죽음에 대한 인식이 죽음을 처리하는 방법, 즉 상장례(喪葬禮)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죽음의 근본적문제와 죽음을 처리하는 의례적 문제에 있어서 전통사회에서의 한국인은 3년상으로 대별되는 유교적 관점의 전통 상장례를 통하여 사별의 슬픔을 위로 받고 다시 새로운 삶의 일상에 적응하는 힘을 얻었던 것이다. 전통상장례의 절차에서 나타나는 애도의 양상(樣相)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슬픔을 대하는 정도를 구분할 수 있다.

이런 슬픔정도의 구분은 고인(故人)에 대한 일반적인 슬픔과 친족의 범위에 따른 슬픔의 정도까지도 구분함과 동시에 시·공간적 문제와 연계성을 살펴봄으로써 현대의 변화된 상장례에서 유족의 사별슬픔과 어떤 차이점이 나타나게 되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전통사회에서 사회적 규범으로 존재한 예서(禮書)와 의례를 통한 유족들의 통제된 슬픔의 형태를 이해함으로써 통제를 통한 의례의 시행(施行)과 현대 상장례에서 위무(慰撫)하지 못하는 사별슬픔 치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대안적 제시를 위한 중요한 단초(斷硝)가 될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인 임종(臨終)은 다른 어느 통과의례보다 경건하다. 임종은 운명(殞命) 또는 종신(終身)이라고도 한다. 임종이 가까우면 정침으로 모시고, 헌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히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눕힌다. 정침이란 원래 남자는 사랑방에, 여자는 안방에 옮겨 임종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속굉(속광)으로 임종이 확인되면 홑이불로 덮고 가족은 흰옷으로 갈아입고 몸에 지녔던 비녀와 반지 따위의 보석을 빼놓은 뒤 머리를 풀고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한다.

예로부터 한국에서는 임종을 보지 못하는 것을 가장 큰 불효로 생각해 왔다. 임종시에는 슬픔이 아무리 심하여도 소란스럽게 하여서는 안 되고 조용히 환자가 마지막 한 생각을 취하고 임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죽음을 맞는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죽음에 대한 심리적 반응은 공포, 허탈감, 비애감, 저항감, 회피감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임종자는 죽음에 대한 심각한 공포 반응을 나타낸다. 또한 자신의 인생이 물거품 같다는 생각을 하거나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함에 따라 주위 사람들로부터 고립(孤立)되었다는 허탈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임종하는 자신에 대해 무력함을 느끼게 되고 가능성 속에서 자신만만했던 생활이 막을 내림으로써 점점 비애감에 잠기게 된다.

이러한 죽음을 맞이하는 자와 그 가족과의 관계에 있어서 슬픔이 사별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이며 예측되는 정상적인 슬픔의 기간은 6-8주에서 2년 내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슬픔의 과정을 겪어나가는데 필요한 시간을 상장례가 제공해 줌으로써 충분히 애도할 수가 있었다. 전통사회에서 한국인은 이처럼 제도화된 의례를 통하여 가족의 유대를 재확인하였다.

상장례에서 죽음은 곧 육신과 영혼의 분리라는 관념이 잘 드러나는 것은 복(復)이다. 복(復)은 초혼(招魂) 또는 고복(皐復)이라고도 한다. 초혼은 고인의 적삼이나 윗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거나 마당에 나가, 왼손으로는 옷깃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옷 허리를 잡고 북쪽을 향해 옷을 휘두르면서 이름을 세 번 부른다(장철수, 1997). 초혼(招魂)을 해도 살아나지 않으면 비로소 죽은 것으로 인정한다. 혼을 부르고 난 뒤 초혼에 사용한 옷은 시신 위에 덮어 두거나 영좌에 걸쳐놓았다.

초혼은 지금 막 육신을 벗어나 멀리 가려는 영혼을 마지막으로 불러 잡는 의식(儀式)이다. 영혼을 붙잡기 위하여 그 사람이 입었던 옷, 그 중에서도 몸에 직접 닿았던 속적삼을 들고서 돌아오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부른다.

그런데 영혼이 가는 방향은 북쪽이라는 생각에서 북쪽을 향하여, 그 사람의 주소와 성명을 부르는 것이다. 고복(皐復)은 회생(回生)의 주술이면서 아울러서 죽음의 확인 절차의 일부를 이루게 된다. 영혼(靈魂)에게 그 육신(肉身)으로 돌아오라고 부르는 것이다. 귀가(歸家)의 권유이자 귀체(歸體)의 권유이다(김열규, 2001). 이 고복의 절차는 갓 육신을 떠나서 저승길에 이제 막 오른 육신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것으로 기대되는 영혼에 대한 교섭이다. 아마도 이 영혼에는 차마 그의 가족, 그의 집 그리고 그의 육신을 쉽게는 뿌리치고 훌훌 떠날 수야 없으리라는 죽은 이의 그것에 겹친 살아 있는 이의 미련이 걸려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기에 부름에 쉽사리 응하리라고 살아 있는 이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사람의 마음이 황황해서 무엇을 구해도 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는 일이라면 무엇이고 가릴 것 없이 하게 된다. 때문에 초혼을 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요, 하늘에게 비는 마음이 있는 때문이요, 공연히 하는 것이 아니다. 초혼을 할 때에는 잠시 곡을 거쳐서, 혼이 도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정성(情性)을 다하였다.